인생은 그저 견디어 내는 어떤 것일 뿐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갈매기(Chaika)>를 원작으로 마이클메이어 감독이 재해석한 것이다.
그 여름,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빠졌다
언뜻 영화의 타이틀만 보면 마치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사랑 이야기만을 연상하기 쉽다. 물론 실제로 영화를 보고나면 그러한 추측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러티브 전반을 통해 감지되는 질투, 연민, 증오 그리고 욕망의 감정들만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마치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속 깊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9세기 말 러시아 휴양지의 한 별장에는 황실극단의 대배우인 이리나(아네트 베닝 분)와 그의 가족들이 모여있다. 오랜 사법부 생활을 청산하고 요양 차 머물고 있는 그녀의 오빠 소린은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이고,
별장에 모여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 간에는 약간의 갈등이 흐르는 가운데 영화는 문득 2년 전 여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리나는 연인 관계에 있는 유명작가 보리스(코리 스톨 분)과 휴가를 즐기러 왔고, 그녀를 따라 여행에 나선 오빠 소린은 이 곳이 맘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틴(빌리 하울 분)은 극작가를 꿈꾸는 청년으로서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유명세와 독선적인 성격 탓에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하는 남자로 성장해 있다. 유일하게 동네 친구인 니나(시얼샤 로넌 분)를 사랑하며 오직 그녀에 대한 사랑만으로 위로를 받는 상태다.
별장지기의 아내인 롤리타는 이리나의 주치의인 돈박사에게 관심이 있고, 그녀의 딸 마샤는 콘스탄틴을 짝사랑하며, 교사인 미하일은 또 마샤를 짝사랑한다.
어느 여름 밤, 콘스탄틴이 준비한 그림자극에서 이리나는 콘스탄틴에게 면박을 주고 결국 콘스탄틴은 분노하여 공연을 스스로 엎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극에서 대사를 맡은 니나는 이리나의 눈에 들어 칭찬을 받게 되고 그토록 존경하던 대작가 보리스와도 인연을 가지게 된다.
이리나처럼 멋진 여배우가 되고 싶었던 니나는 보리스를 유혹하고 훗날 도시로 진출하여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항상 새로운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보리스는 니나를 보고 영감을 얻게 된다. 그리고 도시로 데리고 가 니나가 꿈을 이루도록 지원해 줄 것을 약속한다.
보리스의 마음이 니나에게로 향해있는 것을 눈치 챈 이리나는 적극적인 애정공세로 보리스를 붙잡아 두려고 하는 한편, 니나로부터 떼어 놓으려 한다. 마침 별장기지와의 갈등이 불거지자 서둘러 모두를 데리고 별장을 떠난다.
한편 니나를 사랑하는 콘스탄틴은 갈매기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등 '상징적인' 어떤 행동들을 통해 니나에게 구애하지만 이미 배우의 꿈에 부풀은 그녀는 콘스탄틴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상처받은 마음에 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이마에 작은 상처만 남기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만다.
콘스탄틴에 대한 짝사랑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마샤는 결국 사랑을 잊기 위해 맘에도 없는 미하일과의 결혼을 승낙해 버리지만 콘스탄틴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콘스탄틴은 잡지에도 실릴 정도의 명성을 얻은 극작가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와 보리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태이다.
보리스의 지원에 힘입어 배우가 된 니나는 오히려 보리스의 경멸과 조롱 때문에 폐인이 되어 버리고 한때 그와의 결혼 생활도 가졌으나 결국 아이도 잃고 파산도 당하고, 3류 배우로서 지방공연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별장에 찾아 온 니나는 그런 콘스탄틴과 재회하게 되고, 지난 삶을 후회하는 니나에게 콘스탄틴은 다시금 사랑을 고백하지만 니나는 이런 말을 남길 뿐이다.
"인생은 영광이나 명예를 쫒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어"
그러나 아직 너(콘스탄틴)는 나를 사랑할 수 없으며, 자신을 파멸시킨 보리스를 오히려 더욱 더 사랑하고 있다는 비수와 같은 말을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지방공연을 하기 위해 그를 다시 떠나간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모든 작품들을 불태운 후, 2층 자신의 서재에서 쓸쓸히 총으로 자살한다.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리나와 가족, 그리고 지인들은 거실에 모여 의미도 없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씁쓸한 결말이다.
얽히고 설킨 애정관계는 관객으로 하여금 슬픈 감정을 누리는 것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안톤 체홉이 이 희곡을 코미디라고 규정한 것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결국은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한 열망과 결국 가지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 때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빚어지는 촌극이 아니던가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머리 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주제는 극중에서 니나가 설파한 바로 그 '견뎌내기(Enduring)' 였던 것 같다.
인생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고, 사랑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아마도 사랑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우리가 정상임을 보여준다. 사랑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ㅡ 안톤 체호프
Perhaps the feelings that we experience when we are in love represent a normal state. Being in love shows a person who he should be.
28년간 검사로 살아 왔지만 정작 해 보고 싶은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한 소린은 이제 임종을 앞 두고 있다. 결혼과 작가가 되는 것과 도시에 살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그런 삶을 이미 견뎌 내었다. 자존심이 그렇게도 강한 이리나는 보리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릎을 꿇고, 마샤는 원치않는 결혼생활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다. 니나는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의 꿈을 부여 잡는다. 이미 그것은 욕망이 될 수 없는 것임에도 그저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오직 콘스탄틴 만이 견뎌내지 못하였다. 그가 쏘아 죽인 갈매기처럼 그는 '의미없음'의 자리로 나아가고 말았다.
이 작품에서 갈매기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호숫가를 평화롭게 날으는 생명체이자, 아주 사소한 사건(행위) - 콘스탄틴의 충동적인 총질 따위와 같은 - 에 의해서 한 순간 시체로 변할 수 있는 유약한 존재......
갈매기는 부는 바람에 몸을 싣고 그냥 나는 것 뿐이다.
추구해야만 할 어떤 위대한 목적이 있겠는가......
인간에게 '유의미'란 바로 그러한 것이리라.
모든 생명은 애절한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 버렸네
이미 수 세기가 흐르기 전부터
지구 상엔 그 어떤 생명체도 나지 않았건만
가엾은 저 달빛 만이 부질없이 빛나고 있구나
ㅡ 콘스탄틴의 희곡 대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