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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맨 Sep 03. 2018

아메리칸 뷰티 (스포)

가정은 지켜내야 할 이 시대의 마지막 보루

현대 미국사회와 가정의 문제점을 참신한 시각으로 다룬 영화다. 약간 시대적, 문화적 격차는 있겠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에 비추어 봐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감독의 비껴가지 않는 대담한 연출력과 캐릭터 간의 복잡미묘한 플롯 설정과 전개, 그리고 반전의 결말이 매력적이다. 제목 American Beauty는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면 되시겠다.

이 영화는 녹화된 한 비디오 화면으로부터 시작된다. - 이걸 모르고 첨엔 화질이 왜 이리 구려?? 했다는...ㅋ
바로 주인공 레스터(케빈 스페이시 분)의 딸인 제인이 아빠를 욕하며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내뱉는 장면이다.

주인공 레스터 번햄과 그의 아내 캐롤린

레스터는 어찌보면 평범한 이 시대의 가장이다. 나름 열심히 일 해서 가족들을 부양하지만 그 수준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아내와 자녀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며 스스로의 자존감도 가질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남성 말이다. 그런 그의 인생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딸의 친구 안젤라이다. '아메리탄 뷰티'하면 떠 오르는 명장면 - 전라의 안젤라가 장미꽃잎을 덮고 있거나, 장미꽃 욕조에 누워 있는 장면 - 은 순전히 레스터의 상상 속의 장면이니 너무 야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지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주인공 레스터는 몹쓸 상상 덕분에 자신감을 찾아 가긴 하지만 여전히 아내와 딸과의 관계 회복은 이루지 못한다.

그의 아내 캐롤린(아네트 베닝 분)도 문제가 많기는 매 한가지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탁월하고, 딸에 대해서도 최소한 남편보다는 잘 하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비즈니스의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좌절을 경험하고, 자신에 대한 딸의 반감을 깨닫게 되면서 끝없는 내면의 추락에 빠진다. 더구나 기죽어 살던 남편이 자신감을 찾으면서 오히려 그녀에게 도전을 하게 되니 자괴감은 극에 달하게 되고, 그녀는 돌파구를 비즈니스 경쟁자인 남자와의 외도에서 찾기에 이르른다.

제인, 리키 그리고 안젤라

딸 제인도 자존감이 매우 낮은 아이로서 이런 부모를 증오한다. 학교생활에도 자신이 없고 예쁘고 적극적인 성격의 친구 안젤라 앞에서도 늘 움추러 든 모습을 보인다. 역시나 별다른 돌파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옆 집으로 이사 온 리키네가 새로운 변화의 시발점이 된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고, 평소에 의기소침하며 비디오 촬영에만 골몰하는 리키가 은근히 끌리게 된 제인은 결국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리키의 아버지는 해병대 대령 출신에 매우 엄격하고 괴퍅스럽기까지 한 사람으로서 리키 역시 말 못할 고통과 고민 속에서 성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점점 마음을 의지하게 된 제인은 리키가 찍는 비디오 카메라에 대고 아빠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는다. 심지어 리키에게 아빠를 죽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농담까지 한다.

- 이 비디오 장면이 영화의 프롤로그에 쓰인 부분이다.

한편 자신감을 되찾게 된 레스터는 상사를 협박해 큰 돈을 뜯어내고는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다. 사고 싶었던 스포츠카를 사고, 아내에게도 더욱 당당해 진다. 우연히 옆 집 청년인 리키와도 가까와지게 되는데 리키를 통해 대마초에도 맛을 들인다. 어쨌든 당당해진 모습은 꽤나 바람직해 보이기도 한다.

딸의 친구를 음란한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이 되었든,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이 되었든, 안젤라 못지 않은 헤픈 짓을 일삼는 사춘기 소녀의 일탈이 되었든, 그 방법이 비록 건전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아서 어느 정도의 자존감을 회복한 측면에서는 일견 긍정적이기도 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예전의 그 어느 때처럼 활기를 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온전한 해결책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아내 캐롤린의 외도가 남편 레스터에게 들통이 나면서 부터 모든 상황들이 깨져 버린다.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자는 비즈니스 파트너의 일방적인 통보에 아내 캐롤린은 절규한다. 이 모든 책임을 남편인 레스터에게 돌리며 마치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것처럼 차를 몰고 집으로 간다. 권총을 들고서 말이다....

딸 제인은 리키와 함께 가출을 결심한다. 리키가 이미 집에서 쫏겨 났기 때문이다. 리키의 아버지는 대마초를 피우는 것도 모자라 옆 집 남자(레스터)의 동성애 파트너 짓까지 했다고 오해하고 모진 폭행 끝에 그를 쫏아 낸 것이다. 제인의 가출로 인해 갑자기 집 안에 혼자 남게 된 친구 안젤라는 자연스럽게 레스터를 유혹하고, 아내의 불륜까지 알게 된 레스터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범하려고 한다.

그 순간, 안젤라의 예기치 않은 고백이 이어 진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같이 한다던 그녀, 예쁘고 유능하며 모든 남자들의 끈적한 시선을 즐긴다던 그녀가 사실은 '성경험'이 전혀없는 쑥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잠시 상념에 젖은 레스터는 그녀를 범하려던 행동을 멈춘다. 다시 옷을 입히고, 자신의 눈 먼 욕정을 사과한다. 혹시 자기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서 버림 받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며 서글퍼하는 그녀를 위로한다.

사실 레스터는 정말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레스터는 죽는다.

아들을 의심하는 리키 아버지

범인은....  바로 리키의 아버지.

비록 오해였기는 하지만 아들 리키에게 그토록 난폭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본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것.
우연히 리키의 비디오 테잎에서 보게 된 옆 집 남자(레스터)의 탈의 장면은 그의 욕정을 자극하였고, 아들과의 관계 - 물론 오해다 - 에서 질투와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들을 쫏아 낸 후 레스터를 찾아 가 구애(?)를 하지만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레스터는 당황하며 이를 거부했고, 결국 배신감을 느낀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추측을 해보게 한다.


영화는 프롤로그에서 보여 주었던 "아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제인의 말을 엔딩에서 실현하고 만다. 그리고는 묻는다. "그래, 네 말대로 했다. 이제 어쩔래?" 잠시 관객은 딸 제인의 입장이 된다. "그래, 니 말대로 다 없애 버렸어! 그럼 나는 어쩔건대?" - 실제 영화에서도 총 소리를 듣는 세 사람을 각기 클로즈업 해서 보여준다. 제인, 안젤라 그리고 캐롤린. 마치 관객이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보라는 듯이 말이다.


죽음에 직면하면 살아왔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일순간에 끝나는 장면들이 아니다. 영원의 시간처럼 오랫동안 눈 앞에 머문다.

내겐 이런 것들이 스쳐간다.
보이스카웃 때 잔디에 누워 바라보았던 별똥별. 집 앞 도로에 늘어선 노란 빛깔의 단풍잎. 메마른 종이결 같던 할머니의 손과 살결. 사촌 토니의 신형 화이어버드를 처음 구경했던 순간.....

그리고 제인, 나의 공주. 그리고 캐롤린..
살다보면 화나는 일도 많지만, 분노를 품어선 안된다. 세상엔 아름다움이 넘치니깐. 드디어 그 아름다움에 눈뜨는 순간, 가슴이 벅찰 때가 있다. 터질 듯이 부푼 풍선처럼.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 희열이 몸 안에 빗물처럼 흘러 오직 감사의 마음만이 생긴다.
소박하게 살아온 내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해....

무슨 뜻인지 좀 어려운가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언젠가는 알게 될테니까.

물론 극의 중간 중간에도 이어지긴 하지만, 죽어가는 주인공 레스터의 나레이션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낀 두 가지 키워드는 바로 '소통' 그리고 '가정'이다.


메인 보스터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소통하기 어려운 현대인들의 단면을 보여 준다. 언제나 루저(Loser)였던 레스터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똑똑하고 유능하다는 캐롤린도 제대로 소통하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평범하다'는 평가가 죽기 보다 싫었던 안젤라는 과잉행동을 일삼으며 정작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다. 리키의 아버지 역시, 숨기고 있던 성정체성으로 말미암아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되었고 결국 아들과 아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며 자기 스스로도 살인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오직 리키만이 갖은 고통과 억압 - 아버지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하고, 집에선 폭행, 학교에서도 왕따가 됨 - 속에서도 카메라 렌즈를 통해 소소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는 바람에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비닐봉투가 말하는 얘기를 듣는다. 죽은 동물 - 죽은 것은 말할 수 없다 - 사진을 보며 아름답다고 말한다. 일종의 역설이다.


소통은 '말'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비단 '시간'이 부족해서 만은 아니다. 그것은 관점이다. 시각이 죽은 것을 향해 있으면 산 자들과의 소통은 이루어 질 수 없다.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향해 서 있을 때,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 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죽은 것'들을 바라보고 달려 가느라 여념이 없다. 돈, 행복, 성공, 인기, 사랑, 명예, 칭송....

또한 이 영화에는 마치 미국의 사회상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불륜, 마약, 동성애, 폭력, 가출, 살인과 같은 부정적인 코드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나는 이것이 가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느낀다.

영화 속의 가정은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다. 굳이 주인공 가정의 외도나 불륜 따위를 들지 않더라도 두 집 건너 옆집은 호모부부이고, 옆 집 리키 아버지도 동성애자이며, 그의 아내도 약간 병리적인 문제가 있는 듯 묘사되고 있다. - 리키 어머니에 대한 부분은 영화에서 많이 다루고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순 없다만.

한 마디로 '가정의 파괴'를 보여 주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정의 본연의 의미 상실'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정은 단순히 '가장 작은 사회단위'가 아니다. 단순히 서로 위해 주고 사랑하고 휴식과 위안을 주는 가족의 집합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그것을 깨닫지 않으면 '가정'의 본질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고, 이미 상당 부분 이루어져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는 각종 죄악의 증상들이 만연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죄의 요소(불륜,폭력 등)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말이다.

'가정'은 어떤 값을 치루고서라도 지켜 내야 할 마지막 보루이다.


◇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http://naver.me/xBGG0h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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