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맞닿은 새로운 시작을 바라보며
재미난 영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독특하고 흥미로운 영화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솔직히 '재미'는 없다.
일견 보기에는 일반적인 SF영화처럼 보이지만 외계인이나 UFO의 등장은 단순한 차용일 뿐 상당히 철학적인 영화라는 생각이다. 때문에 난해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는 바로 '언어'와 '소통'이다. - 이와 관련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바로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유일한 이유다. 영화는 초반부에 이안박사(제레미 레너 분)가 읽는 책의 서문을 통해 이에 대한 암시를 준다.
언어는 문명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싸움에서는 첫번째 무기가 된다.
난데없이 등장한 외계인과의 지난한 소통은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 분)와 이안 박사의 노력을 통해 조금씩 진전을 보인다. 그들이 전쟁(무기)을 주러온 것인지, 문명을 선물하러 온 것인지 서서히 윤곽이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불완전한 소통이 얼마나 상반된 결과를 초래할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의 시사점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유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라는 영화 속 대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결국 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판단한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게임의 언어를 가르친다면 저들은 이기고 지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손바닥을 펴서 인사하는 화해의 메시지로 첫 대화를 시도한다. 그 이면에는 언젠가 자신의 딸(HANNAH)에게 가르쳐 주었던 '논제로섬게임'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사상이 깔려있다. - 이 단어가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머리속에 맴돌았다.
또 다른 큰 줄기는 바로 시간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의 언어는 선형적이고 순차적인데 비해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비선형적이고 동시적이다. 결국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시간적인 흐름을 초월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감독은 이 어려운 개념을 관객이 쉽게 인식할 수 있도록 그냥 '미래 예지능력'으로 그린 것이라 여겨진다.
이 영화를 단순한 타임리프물도 보면 상당히 머리가 아파진다. 수도 없이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시간순으로 재배치하는 것은 1000pcs 직소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감독은 원천적으로 시간적인 재배열이 불가능하도록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양대 이데올로기 시대와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give & take'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룰을 배웠다. 그 속에서 'win-win'을 실현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상황을 해결한 것은 무조건적이고 선제적인 '내어줌'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어떤 종교적인 진리와 맞닿아있는 행동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간에 대한 관점이 바뀌어야만 한다. 영속적이며 동시적인 시간관 속에서는 먼저와 나중이 의미가 없고, 많고 적음도 문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Arrival 이다. 대개 도착이란 끝을 의미하지만 마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일 수도 있다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는 듯 느껴진다.
명장면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루이스가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3~4겹의 방호복을 벗어 던지고 저들 앞에 홀로 나아가는 장면이다. 오직 소통을 위한 화이트 보드 하나만 들고 말이다.
내가 꿈꾸는 퍼실리테이터의 모습과 왠지 닮아있다.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http://naver.me/FJLo8t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