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도록 아픈 사랑이다.
모든 것을 갈라 놓는 냉전의 시대,
죽도록 사랑했지만 어긋나기만 했던 사랑,
결코 맺어질 수 없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세기의 러브스토리다.
메인포스터 For Parents
40년간 애절한 사랑을 해 온 부모님께 이 영화를 바친다고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은 말한다. 아마도 그가 보고 느꼈던 '진정한 사랑'을 이러한 가상의 시나리오에 얹어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나자 마음이 아려왔다.
하지만 아름답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아픈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정녕 그들이 '세상 끝까지 함께 하는' 방법은 피안으로의 도피 뿐이었을까…. 영화 자체에 대한 평을 하기보다 왠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얼마 전 다시 읽어 보았던 에리히프롬의 <사랑의 기술>의 구절들이 떠 오른다.
영화는 7개의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시퀀스 사이에는 블랙스크린을 수초 동안 배치하여 마치 연극에서의 암전처럼 사용했다. 시간적 비약을 보여주는 몽타주 기법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는 관객의 유추에 맡길 뿐, 각 시퀀스는 철저하게 두 사람의 연민과 갈등에만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내러티브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관객 스스로 임의의 가정을 설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빅토르 앞에서 음악적 재능을 평가받는 줄라 따라서 상세한 스토리 묘사는 생략하고 각 시퀀스를 함축적으로 표현할만한 제목을 달아 보았다. (내맘대로~^^)
1949 폴란드 - 빅토르와 줄라의 만남, 사랑의 시작
1951 베를린 - 엇갈린 망명길, 운명적 결말의 예고
1954 파리 - 우연한 재회, 사랑을 다시 확인하다
1955 유고슬라비아 - 사랑의 갈구는 더욱 간절해지고...
1957 파리 - 잠시의 행복, 그러나 반복되는 이별
1959 폴란드 -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빅토르
1964 폴란드 -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잃은 줄라
자유세계 파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ㅡ <사랑의 기술> P17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다
빅토르는 이지적이며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음악가이다. 폴란드 상류층 출신인 그의 일탈은 '사랑의 열병'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민속악단은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다 오디션 과정에서 파격적으로 줄라를 발탁한다. 동료이자 애인인 이레나를 두고 줄라와 연인관계를 맺는다. 자유세계로의 망명을 꿈꾼다. 음악적 순수성을 훼손하며 그의 민속악단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 이용되는 것을 허용한다. 줄라와 함께 망명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파리에서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한다. 클래식에서 재즈로 음악성향을 바꾼다. 줄라를 다시 만나기 위해 밀고를 하고 스파이를 자처한다. 15년의 징역형을 감수하고 폴란드로 다시 들어간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줄라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성혼의식과 동반자살에 이르기까지….
이지적이고 감수성이 뛰어난 음악가, 빅토르
아버지가 저를 어머니로 착각하길래 칼로 찔렀어요. 괜찮아요! 죽지는 않았어요ㅋ
줄라는 불같은 여자다.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사랑을 만난다. 사랑은 그녀의 열정을 토해낼 하수구다.
민속악단에 입단한 줄라와 춤을 지도하는 이레나 범죄전과가 있는 그녀는 어떻게든 민속악단에 들어가야 했다. 타고난 사기성과 기지, 그리고 열정으로 빅토르의 눈에 들어 합격을 한다. 그리고 그의 연인이 된다. 전과자라는 약점 때문에 당으로부터 빅토르를 감시하라는 지령을 받지만 줄라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고백한다. 의외로 빅토르가 화를 내자 줄라는 '화낼줄 알았다, 내가 너를 파멸시킬수도 있었는데'하며 욕을 해대고 분을 못이겨 강물에 뛰어든다. 그녀의 사랑은 그렇게 활화산처럼 뜨거웁다.
재즈버전 '두 개의 심장'을 노래하는 줄라 불같은 열정과 노력으로 민속악단의 주연이 된다. 함께 망명 길에 오르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폴란드를 탈출한다. 이태리 남성과의 위장결혼이다. 그래도 교회에서 한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하며 자위한다. 빅토르의 뜻 - 엄밀히 말하자면 오해지만 - 에 따라 앨범제작자와 섹스를 한다. 그 일로 빅토르를 원망한다. 어렵사리 만든 자신의 음반을 내던지고는 돌연 그를 떠난다. 그러나 폴란드 형무소에 갇힌 그를 다시 찾아간다.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당간부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술과 약에 찌들어가며 3류 술집에서 노래를 한다. 빅토르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며 폐허가 된 교회당에서 성혼의식을 치루고 동반자살을 결심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 顯示)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ㅡ <사랑의 기술> P42
이 영화는 플롯 설정도 그러하지만 음악과의 연관성이 두드러진다. 물론 OST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극의 흐름을 따라가며 음악이 어떻게 생동감을 잃어 가는지를 살펴 보는 것도 좋은 관점이리라 생각된다.
영화 초반 민속악단 숙소에 울려 퍼지던 쇼팽의 즉흥환상곡. 빅토르의 피아노 연주는 기품이 있고 힘이 넘쳤다. 마치 카네기 홀의 공연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파리로의 망명 이후 그는 재즈바에서 활동하게 된다. 줄라와의 이별로 생기를 잃은듯 한 빅토르의 음악은 그저 반주에 불과했다. 생계를 위해서 영화음악에도 참여를 한다. 그의 음악은 한낱 효과음으로 전락한다. 줄라가 폴란드로 홀연히 떠나버린 이후 재즈바에서의 피아노 연주는 파열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형무소에서 석방되고 줄라를 찾아 왔을 때, 이미 그녀의 남편이 된 당간부가 '다시 음악계에 복귀를 하신 것이냐'고 묻는다. 그의 답변은 "No".
그는 완전히 음악을 버렸다.
영화의 오프닝은 투박한 폴란드 농민들이 민요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줄라는 오디션 장에서 폴란드 민요 '두 개의 심장'을 무반주로 부른 후 합격 한다. 이 곡은 영화 전반에 걸쳐 3번이나 더 리플레이 된다.
첫 번재는 민속악단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화음까지 곁들인 수려한 이중창 곡으로서이다. 줄라의 매력이 마음껏 발산되어 보인다. 두 번째는 파리로 망명한 이후 빅토르의 손을 거쳐 재즈풍으로 재탄생한 곡으로서 제법 세련된 샹송의 이미지로 듣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왠지 줄라의 표정은 어둡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어버전으로 편곡된 것이다.
빅토르는 줄라를 위해 그녀의 음반취입에 열을 올리지만 정작 줄라는 불어 가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노래가 '텅 비어 있다'고 역정을 내는 빅토르는 몇 번이고 녹음을 반복한다. 결국 음반은 만들어졌지만 줄라는 쓰레기 통에 집어 던지고 만다. 영화의 후반부, 멕시코 술집에서 부르던 그녀의 노래와 율동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음악을 잃었다.
두개의 심장 네개의 눈이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흘리네
검은 눈동자들이 눈물을 흘리네
엄마는 그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네
- 폴란드 민요 '두 개의 심장' 가사 일부
내가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집착한다면, 그 또는 그녀는 생명을 구조하는 자일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된다. 홀로 있으려고 해 본 사람은 누구든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ㅡ <사랑의 기술> P153
사랑에 빠지면 시간은 상관없다
이 말은 줄라가 '시계 추는 시간을 죽인다'라고 의역했던 노래가사의 의미를 묻자 줄리엣이 부연설명해 주었던 말이다. - '두 개의 심장'이 불어버전으로 만들어 질 때, 빅토르의 동거인이자 시인인 줄리엣이 번역을 맡았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바흐가 연주될 때, 나는 이 말이 '맹목적인 사랑은 인생(시간)을 죽인다'라고 읽혀졌다.
우연히 재회하는 빅토르와 줄라 빅토르와 줄라는 열렬하게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비록 초반에는 이기심도 있었고 갈등과 번민에 시달리기는 했었으나 생애 전반을 돌아보면 서로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다. 어쩌면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상대방을 구원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행복했던 파리 생활, 그러나 엇갈리는 사랑 줄라의 시종일관 흔들림없는 바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이면에는 원초적인 분리불안이 잠재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녀는 망명의 순간 민속악단을 택했다. 조국 폴란드에서의 성공과 일신의 안위가 보장된 길이었다. 하지만 후회했다. 불같은 사랑의 분출은 빅토르에게 달려가게 만들었고 애꿎은 운명이 만들어졌다.
빅토르는 줄라를 남겨두고 음악을 택했다. 하지만 줄라를 잊지 못하고 탕진하는 삶을 살았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줄라를 찾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자살'이라는 파국이었다.
"저 쪽으로 가자! 저기가 경치가 더 좋아" 동반자살을 결심하는 엔딩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 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한다. ㅡ <사랑의 기술> P170
민속악단 시절, 줄라가 빅토르에게 자신이 프락치임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이런 대화가 나온다. - 영화의 정확한 대사는 아님. (의미전달의 목적으로 필자가 임의로 구성한 문장임)
빅토르에게 프락치임을 고백하는 줄라 "그들이 나의 어떤 것을 감시하라고 시켰는데?"
"자유를 갈망하는지, 서방세계 방송을 듣는지,
연맹에 대해 좋게 생각하는지, 혹은 신을 믿는지 등등"
"..........."
"자기는 신을 믿어?"
"..........."
"난 신을 믿어!"
죽음을 앞두고 결혼서약을 하는 빅토르와 줄라 신을 믿는다고 말한 줄라, 그리고 그 물음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빅토르. 에리히프롬이 설파한 그 '사랑'을 이해했더라면 아마도 그들의 답변은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휠씬 덜 아팠을 것이다. - 시대적인 비극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감히 말한다.
너무 아픈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