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버린 머리를 깨우는 시간.
33년의 공직 생활은 ‘민원인과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행정 보고서를 썼고, 교육 자료를 만들었으며, 민원인들을 위해 평생을 보냈다. 그래서 나는 배움의 길에 다시 들어설 때, 적어도 ‘글쓰기’만큼은 내게 익숙한 영역일 것이라 자만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 강의실에서 마주한 ‘리포트’라는 이름의 과제는 내가 알던 문서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떤 형식으로 내 생각을 전개해야 할지 모든 것이 낯설고 막막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것을 이해한 것 같았지만, 막상 빈 모니터 앞에 앉으면 머릿속은 하얀 도화지가 되었다. 분명히 귀로 들었던 지식은 강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33년 동안 굳어진 나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성벽 같았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기억력의 배신이었다. 전공 서적을 펼치고 한 페이지를 정독하고 나면,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방금 읽은 내용이 감쪽같이 지워졌다. 지식은 내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치 단단한 바위에 통통 튕겨 나가는 공처럼 자국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갔다. 안경을 고쳐 쓰고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되풀이해 읽어도, 글자들은 눈앞에서 춤을 출 뿐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내 머리가 정말 이렇게까지 굳어버린 걸까?”
자괴감이 밀려오는 밤이면 창밖의 정적은 더 무겁게 어깨를 눌렀다. 리포트 한 줄을 적기 위해 밤새 전공 책과 씨름하고, 자료를 찾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과제 제출 마감일이 다가오면 가슴은 두근거리고 입술은 바짝 말랐다. 젊은 시절의 밤샘과는 차원이 다른 육체적 피로가 몰려왔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 과제는 단순한 숙제가 아니라, 내가 다시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발표용 PPT 자료를 만드는 과정은 또 다른 거대한 산이었다. 화면 위에 사진을 배치하고 글꼴을 맞추고 내용을 정리하는 사소한 작업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사투였다. 서툰 솜씨로 마우스를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앞은 침침해졌다.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모니터와 마주하다 보면, 창밖으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비쳐오곤 했다.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완성한 과제도, 막상 제출하려고 보면 한없이 투박하고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그 부족함을 메워준 것은 주변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선생님, 이 부분 정말 정성스럽게 정리하셨네요!”라며 건네는 동기들의 칭찬과 나의 뒤늦은 도전을 진심으로 격려해 주시던 교수님의 응원은 내가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릴 수 있게 하는 연료가 되었다. 그들은 나의 서툰 결과물 속에서 내가 밤을 지새우며 흘린 땀방울을 먼저 읽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