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떨렸던 신입생의 첫날
서른세 번의 봄을 사무실 창밖으로만 보아왔다. 1988년 임용된 이후 나에게 봄은 그저 ‘비상이 해제되는 계절’ 혹은 ‘민원이 늘어나는 시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60세가 되어 맞이한 2024년의 봄은 전혀 다른 색깔로 다가왔다. 나에게는 이제 사무실 책상 대신 대학교 강의실 책상이, 결재 서류 대신 빳빳한 전공 서적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 설렘을 온전히 누리기엔 나의 현실은 너무나 처절하고 빡빡했다.
입학 후 첫 한 달, 나는 두 개의 평행우주를 살고 있었다. 평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학원의 딱딱한 의자를 지켰다. 한시라도 빨리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생존의 절박함이 나를 그곳에 묶어두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설레던 대학 수업은 주말인 토요일 하루밖에 들을 수 없었다. 다른 동기들이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안 캠퍼스의 낭만과 배움의 열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학원 강의실 구석에서 홀로 대학 강의계획서를 뒤적이며 소외감을 견뎌야 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입학 후 두 달이 지나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선 기분이었다. 금요일 전공 수업을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시험을 치러야 하는 난감한 상황. 교수님의 목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과목의 시험지를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은 33년 공직 생활을 하며 웬만한 위기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나조차 숨이 막히게 했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야속하게 굳어버린 나의 뇌였다. 옆자리의 젊은 동기들은 한두 번만 쓱 훑어봐도 금방 외워버리는 내용이, 나에게는 백 번을 읽어도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쥐가 날 정도로 머리를 쥐어짜며 읽고 또 읽어도, 다음 장을 넘기면 앞 장의 내용이 안개처럼 희미해졌다. “아, 이것이 세월의 한계인가.” 자책이 밀려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한 번 볼 때 나는 열 번을 보고, 그들이 잠들 때 나는 돋보기를 고쳐 쓰며 한 줄을 더 읽었다. 그것은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처절한 증명이었다.
사실 내가 이 나이에 외식 창업 조리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거창한 미식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30년 넘게 워킹맘으로 치열하게 살았지만, 정작 퇴근 후 아이에게 따뜻하고 제대로 된 요리 한 접시 내어준 기억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늘 가슴 한구석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엄마가 이제라도 제대로 배워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영양가 있는 밥상을 차려줄게.” 그 소박한 약속이 나를 학교로 이끌었다. 또한, 교회 식구들과 이웃들에게 내가 배운 손맛을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도 컸다.
하지만 시작은 절대로 소박하지 않았다. 한식과 양식은 기본이고 제과제빵, 전통주와 발효식품까지 전공과목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여기에 경제학이며 컴퓨터 활용 같은 교양 과목까지 더해지니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비명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사람들의 온기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2학년 선배들이 준비한 환영식은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조리학과 선배들답게 직접 정성껏 만든 고추장과 조청, 각종과 실습에 꼭 필요한 깨끗한 행주 세트와 조리모를 선물로 건넸다. 그 꼼꼼한 손길에서 “우리와 함께 이 길을 걸어보자”라는 응원의 메시지가 들리는 듯해 코끝이 찡해졌다.
첫 실습수업의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집 주방과는 차원이 다른 전문 조리 도구들 앞에서, 나는 마치 전쟁터에 나선 초병처럼 떨었다. 날카롭게 갈린 칼을 잡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던 그 서늘한 긴장감. 교수님이 쏟아내는 전문 용어들은 마치 외국어처럼 생경해서 처음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실습 도구와 조리복, 앞치마에 무거운 전공 서적까지 챙기다 보니 짐은 날로 늘어갔다. 결국, 동기들 모두가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 학교의 넓고 큰 3층 주차장이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그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수업은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가 넘어서까지 점심시간조차 없이 빡빡하게 이어졌다. 이틀간의 수업을 마치고 나면 마치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하루 이틀은 꼬박 누워 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체력적 한계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고단함 속에서도 찰나의 보상은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릴 때 교정 가득 피어난 개나리와 봄꽃들을 바라보며 동기들과 햇볕을 쬐던 시간. 60세에 비로소 누려보는 '진짜 학창 시절'의 낭만이었다. 시험 기간에는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질 만큼 긴장되지만, 쥐가 날 정도로 암기한 문장 하나가 시험지 위에서 살아 움직일 때의 그 짜릿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60세의 신입생으로서, 인생의 가장 뜨거운 봄날을 통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