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은 너무 유명하다. 그래서 고심이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만 있어도 찾아오는 그림은 어쩐지 소홀히 보게 된다.
그러다 서울에서 고흐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다. 어린 큰통수를 데리고 갔다. 큰통수에게 고흐는 새로운 화가일 테니까 잘 사귀어보라고. 사람이 너무 많아 큰통수는 금세 흥미를 잃고 미술관 복도를 돌아댕겼고, 대신 그날 고심이가 처음인 듯 고흐를 만났다. 찾아오는 흔한 고흐 말고 낯선 고흐를.
사람들 머리통 반, 그림 위쪽 반, 이렇게 보면서 지나가는 그림이 많았다. 그러다 어떤 그림을 보게 되었다. 나무였다. 가지가 무성한 윗부분이 먼저 보였는데 무슨 나무가 저렇게 근사하지 싶었다. 도슨트를 따르는 무리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온전히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은 꽤 컸다. 따라서 나무도 컸다. 클 뿐만 아니라 마치 전시장에서 방금 솟아난 듯 싱싱하고 힘찼다. 가지에는 초록 빨강 분홍 하양 노랑 잎들이 폭발하듯 피어 있었다. 게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느낌마저 들어 손을 뻗어 볼 뻔했다. ’만지지 마시오‘의 전시장에서.
’생레미 정신병원의 뜰 The Garden of the Asylum‘
고흐가 정신 질환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다. 정신질환과 이 나무가 어찌나 부조화스러운지, 그 먼 간격이 고심이 가슴을 두드렸다.
언젠가 한국전쟁에 대한 사진을 봤을 때 비슷한 걸 느꼈다. 어린 아이가 골목 바닥에 앉아 국수를 먹는 흑백 사진이었다. 국수 그릇은 맨바닥에 놓여 있고 신발도 신지 않은 남루한 아이는 엎어질 듯 몸을 기울여 국수를 퍼먹고 있었다. 수많은 통계 숫자보다 더 선명하게 전쟁이 와 닿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노랑이 검은 바탕에 놓일 때 가장 잘 보이듯, 전쟁과 가장 멀어야 할 어린아이 뒤로 페허가 드리우자 전쟁이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다. 고심이가 처음 사진이라는 매체에 매료된 순간이기도 하다.
영혼이 아픈 사람들의 장소. 생성보다는 소멸하는 것들과 가까운 장소.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이 나무를 그렸다. 가장 반대되는 장소에 놓인 나무는 당장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은 생명력을 얻었다. 한톨의 질투도 없이 고흐의 힘찬 붓질의 응원을 받은 나무는 아름다웠다.
고심이는 나무가 멋지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에 겹쳐 보이는 고흐의 상황에 마음이 아팠다. 결국 병원의 고흐와 뜰의 나무는 서로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보색이었다.
고흐가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이런 성정을 가졌구나... 한 그림에서 알아버린 고흐가 전시장 내내 고심이를 이끌었다. 그림들을 보며 고심이는 중얼거렸다. 고흐 정말 미쳤다... 멋지게.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은 고흐의 작품이 가장 많은 곳이다. 미술관에 가는 날은, 늘 그랬듯 날씨 요정이 와 주어 화창했다.
고흐의 작품은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다. 네덜란드 오터로의 크뢸러-뮐러 미술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 미술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러시아와 브라질에도 조금 있다.
고흐는 37살, 짧은 생을 살았고 그림 그리는 기간도 10년 정도로 짧았다. 그러나 그 기간에 그린 그림은 유화 860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1300여 점으로 엄청난 양이다. 기술적으로 열악한 환경과 경제적 궁핍을 생각하면 고흐가 얼마나 애썼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 많은 모델을 구하고 더 많은 물감을 살 수 있었다면 그는 더 많은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늘 그림으로 세상과 동생 테오에게 보답하고 싶어했으니까.
평일 오전인데도 미술관은 붐볐다. 날씨와 계절에 상관 없이, 요일과 시간에도 구애받지 않고 고흐 미술관은 늘 관람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고흐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걸까. 고흐가 이 모습을 본다면, 이 열기의 한자락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의 영혼이 좀 더 행복하게 쉴 수 있을까.
미술관에는 고흐의 초창기 작품들도 많았다. 고흐의 작품은 크게 네 시기로 나뉜다. 그가 머물렀던 장소에 따라 그림의 특징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처음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네덜란드 시기에 그는 주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이때 그림들은 모두 '감자 먹는 사람들'의 손마디처럼 울퉁불퉁하고 투박하고 어둡다. 그리고 이를 귀하게 여기는 고흐의 마음이 진하게 배여 있다.
파리로 건너왔을 때 고흐에게 새롭게 다가온 것은 밝은 색깔이었다. 수많은 예술가에게서 자극을 받을 때마다 그림은 다채롭고 환해졌다. 인상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표현 기법도 다양해졌다.
이후 파리를 떠나 마음의 안정과 밝은 빛을 찾아 간 곳은 남프랑스 아를이었다. 그곳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그림들이 탄생했다. '해바라기' '노란 집' '고흐의 방' '밤의 카페 테라스'...
구불거리는 터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났고, 빛이 마치 대표 색깔인 듯 자리잡아 그림들이 더욱 환해졌다. 그러나 한켠에서 고흐 자신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고갱과의 불화도,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도 그 즈음에 일어났다.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생레미 정신병원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구불거리는 터치는 더욱 강해져서, 그가 그리는 모든 것이 격렬하게 굽이치며 어딘가로 휩쓸려가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랑하는 동생 테오의 아들,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빈센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아몬드 나무 Almond Blossoms'는 차분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이 흰 꽃봉우리로 한가득 피어 있다.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은 그림이 가만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것 같다. 집도 교회도 사이프러스 나무도, 무엇보다 하늘과 별이 계속 소용돌이친다. 고흐의 마음속이었을까. 아니면 자연을 몹시 사랑한 화가의 황홀한 우주에 대한 대답이었을까.
고흐는 정신병원을 나와서 파리에서 가까운 오베르에서 마지막 70여 일을 보냈다. 거의 매일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렸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자신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밀밭에 찾아온 까마귀마저 반가운, 고독한 시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실패하는 쪽을 택하겠다.' 자신의 실패를 늘 예감했고 그러면서도 계속 실패하는 쪽을 선택했던 고흐다. 왜 마지막에 좀 더 자신에게 실패를 견딜 기회를 주지 않았을까. 고심이는 고흐의 편지집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던 생각이 났다.
고흐의 환하고 아름다운 색들이 아주 어두운 색에서부터 서서히 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두움을 이해하는 밝음이라서 감사했다.
고심이는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을 바라보는 작통수를 사진에 담았다. 부디 그림의 어두움이 앞에 선 젊음에게 진실함과 깊이를 전해 주기를 바라며.
한 무리의 청년들이 '붉은 양배추와 마늘 Red Cabbages and Garlic' 그림 앞에서 한창 토론 중이었다. 미술관에서 토론이라니, 폐가 될 수도 있는데 어쩐지 잘 못 느끼겠다. 아마 대부분의 관람객이 이어폰을 끼고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청년들의 모습이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근데 양배추와 마늘을 놓고 저토록 열띤 토론이라니, 식품영양학과 학생들인가.
'뿌리 Tree Roots'라는 그림 앞에서는 한 남자 노인이 오래도록 서 있었다. 뒷짐을 지고 앞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났다가 하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냈다. 작은 디지털 카메라였다. 모두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그림을 담고 지나가는데, 노인은 카메라를 들고 손이 바르르 떨릴 때까지 뷰파인더를 들여다봤다. 마치 그림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담고 싶어하는 몸짓 같았다. 위로 뻗어가는 잎들보다 아래를 떠받치는 묵묵한 뿌리가 삶의 노년에 주는 울림이 더 컸던 것일까.
전시장의 열기를 피해 밖으로 나오니 중앙계단 벽 위로 프로젝터가 쏘아올린 해바라기가 피고 있었고, 아몬드나무가 자라고 별이 빛나고 까마귀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고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혹시 미디어 아트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언어는 늘 앞서 있었으니까.
미디어로 작업하면 초기 비용은 들겠지만 건건이 물감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고흐처럼 작품 많이 하는 작가에게는 유리하겠는데... 동생 테오에게 늘 물감 값을 걱정하던 고흐의 편지가 떠올라, 고심이는 중얼거렸다.
고흐는 평생 자신의 방법으로 세상을 사랑했다. 자신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의 언어에 신조어가 많아서, 그의 언어가 힙해서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쉴 틈 없이 전파를 송신했지만 수신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그에게 조금 늦게 도착했더라면... 왜 그렇게 외로운 시대에 그를 불러냈을까.
몸은 현재를 살지만 영혼은 미래를 사는 사람들, 흔히 선구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많은 빚을 지지만 아무 것도 돌려주지 못한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주지 않았냐고. 그건 고흐한테가 아니라 서양미술사에 주는 거 아닌가.
고흐가 불행하지 않았으면 이토록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거라고. 그 또한 말인가 폭력인가. 불행을 담보로 한 어떤 예술도 찬성할 수 없다.
한 가지 대답할 수 없는 건 있다. 고흐는 자신의 삶을 불행해했을까. 불행해했다면 그토록 그림을 그렸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 가슴 속 진실 하나가 온몸을 불태우게 될 걸 알면서도 그 불씨를 놓지 못하는 사람. 고흐의 그림은 그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진실이었고, 그것 때문에 뜨겁고 고통스러웠으며 불화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유일하게 행복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든 고흐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고심이는 그 생각에 적극 찬성한다. 삶이란 감히 밖에서 ’구경‘하는 게 아니라 안에서 ’결정‘하는 거니까.
분명한 건 고흐는 자신의 고통을 그림에 전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고통은 자신이 짊어지고 그림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림들은 씩씩하고 눈부시고 황홀했다. 밤하늘의 어둠까지도. 보통 부모가 자식에게 그러지 않는가.
잊혀진 수많은 고흐가 있을 것이다. 발견되지 않은 고흐가 있을 것이다. 테오 같은 동생이 없었던 고흐, 요한나 같은 제수(弟嫂)가 없었던 고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깊게 닿았던 마음은 되돌릴 수 없는 거라서, 앞으로도 고심이는 고흐라는 화가를 막무가내로 응원할 것 같다. (같은 ’고‘씨라서 그런 거 아님)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알아들어요.
먼 나라에서 온 고심이라는 사람까지도 당신의 외로움을, 낯가림을, 진심을, 무엇보다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해해요.
오래도록 당신을 응원할게요.
고흐 안녕,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