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시간 순서를 따라갔는데, 기억과 생각은 두서없이 떠오르네요. 떠오르는 순서대로 글을 발행해 두겠습니다. 나중에 순서를 다잡더라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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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첫인상은 아 자유롭다,였다.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어디 놀러가는 것 같았다. 평일 오전이니 그럴 리 없는데도. 걷는 건 성에 안 차는지 다들 자전거로 쌩쌩 달려서 속도감까지 느끼게 해 주었다.
날씨도 너무 좋았다. 맑은 건 기본이고, 바람이 살살 불면서도 햇빛이 쨍쨍했다. 해도 옛다 하고 빛을 던져 놓고 놀러가 버린 듯 저녁 늦게까지 그랬다. 가끔 달리는 자전거에서 하이, 헬로우 하는 인사가 날아왔다. 이 활달함은 어디서 오는 거지?
암스테르담은 손꼽히는 관광 도시니 친절함은 기본으로 장착돼 있을 거다. 영어도 엄청 잘한다. 그런데 단순한 외적 상냥함이라기보다는 속에서 우러나오는 뭐가 있다.
일반적으로 네덜란드인은 돌려말하기보다는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한다고 한다. 또 권위주의는 아주 싫어하고 서로 간의 평등을 중요시한다. 그러니까 머뭇대지 않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다. 소수자와 이민자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라 하니 그만큼 나와 다른 대상에 대한 터부도 적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기분이 좋으면 담백하게 헬로, 하는 거다.
그렇다고 그들이 헐랭이 기질을 가진 건 아니다. 오히려 실속을 챙기는 국민이다. 오랫동안 상업으로 번영해 온 나라답게 뼛속 깊이 실용주의가 박혀 있다.
아무튼 기분은 좋았다. 목적 없는 가벼운 인사가 노랫소리 같았다.
암스테르담은 흡연에 너그럽다는 인상도 주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거리 곳곳에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고심이는 담배 연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게 모여 있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모여 있다고 해서 다 얘기를 나누는 건 아닌 시대다. 한국도 흡연 구역에서 사람들이 모여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다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홀로 피운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얘기를 하기 위한 구실로 담배를 피우는 것 같다. 연기 사이로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게 보기좋았다.
운하 근처로 삼삼오오 몰려가는 친구들은 어쩐지 고등학생들 같았다. 세상은 원래 알록달록한 거예요, 라는 듯 머리 색도 피부 색도 다양했다. 하지만 백팩에 매달린 앙증맞은 키링들은 닮은꼴이었다. 학생들은 딱히 바쁜 일은 없는 듯 끌고 가던 자전거를 기대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들 딴딴한 몸에서 나오는 웃음은 웃는다,기보다는 뿜는다,는 느낌에 가깝게 싱그러웠다.
이 틴에이저들에게도 껄끄러운 사춘기가 있을까. 권위에 눌리지도 않고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여도 비난 받지 않는 나라인데. 정체성 문제나 약물 문제가 늘어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OECD보고서에서 몇 년째 ‘가장 행복한 아동,청소년의 나라’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생애주기의 가운데 토막, 가장 에너지가 왕성한 시기를 행복하게 지나는 경험은 얼마나 멋진 걸까.
고심이는 사춘기란 말을 싫어한다. 사춘기라는 말이 있어서 사춘기가 오는 것 같아서.
언어가 없으면 인간은 깃발을 잃은 군중처럼 오합지졸로 난리치다 흐지부지된다. 그런데 사춘기라는 깃발이 떡 하니 있으니 그 아래 어중이 떠중이 모이는 것이다. 특히 중2 녀석들이 신이 나서. 처음엔 어설퍼도 자신들을 설명하는 깃발이 있으니 점점 마음을 굳게 먹는 것이다. 맞아 나 사춘기지,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그래서 다들 사춘기를 얘기할 때 고심이는 무시했었다. 사춘기 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며.
선명하게, 오랫동안 붙들려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부모가 잘못하니까 애가 사춘기가 오지.
아니다. 부모가 잘못하지 않아도 애가 사춘기가 온다.
아니,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온 건가.
사춘기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빠져나가는 현상이다. 그런데 좀 터프하게 빠져나가는 것이다.
고심이는 안 울었다. 첫 아이라 첫 경험이었지만 의연했다.
하지만 결국 의연한 척했다는 걸 몸이 증명해 버렸다. 몸이 씨게 고장났다. 사실 안 그랬으면 좀 억울할 뻔하기도 했다. 그 말도 안되는 수발을 다 들었는데, 어디 한 군데 고장이라도 나 줘야 하는 거 아닌가.(네?)
고심이도 화나고 괘씸하고 슬펐다. 하지만 눈물을 쉽게 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쟁터에 남은 마지막 총알 같은 거, 그마저 없으면 빈 총을 들고 매번 전투에서 패배할 것 같은 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눈물을 삼키면 그것 자체가 힘이 되기도 했다. 삼키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안에 단단한 덩어리가 생겨났다. 흘리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되돌아보니 아니다. 기억이란 게 불확실하구나.
큰통수의 사춘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이 어머니신가요?
-네...
당시 걸려오는 전화 중 큰통수를 언급하는 건 냅다 불안부터 투척했다. 어른 남자 목소리... 담임선생님은 아닌데.
△△빌딩인데요, 아드님이...불을... 방화... 암튼 얼른 오셔야...
핸드폰을 쥔 손을 다른 손이 꽉 잡고 진정시켜야 했다. 언뜻 들리는 무시무시한 단어들...
당장 오라고 했는데 정신이 멍해지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 후 겨우 집을 나섰다. 2개의 6차선 도로를 어떻게 건넜는지 기억이 안 났다. 어떤 건물 3층으로 올라가니 큰통수가 있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앞에 어떤 아저씨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 고심이의 눈에서 무언가 터져나왔다. 입에서 소리도 함께 터졌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어떤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형사상의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던 때였다.
댁의 아들이 불냈다
마침 내가 보고 안 껐으면 어쩔 뻔했냐
사람들 대피하고 난리났다
영업장 손해가 막심하다
내가 당장 경찰에 넘기려다가...
고심이는 싹싹 빌었다. 진심이었다. 상상도 안되는 큰일이었다.
고심이가 비는 걸 보고 큰통수도 빌었다. 죄송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큰통수도 울었다.
둘 다 같은 마음으로 빌고 있으니 아저씨도 더 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도망간 두 놈을 더 잡아서 경찰에 넘기든지 어쩌든지 하겠다, 손해도 그때 따지겠다, 그나마 이녀석은 도망 안 가서...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다,
고 했다.
집까지 걸어오는 길이 천리 같았다. 하필이면 슬리퍼를 신고 와서는.
엄마가 우는 걸 처음 봤을 거다. 큰통수는 너무나 풀이 죽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 대장이었는데. 아무도 함부로 말도 못 걸고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그저 잊지 않고 집에 들어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는 가족들의 성원 아래 사춘기의 깃발을 드높이고 있었는데.
큰통수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은 안했다. 다만 집에 오자 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부엌에서 쭈뼛대더니 얘기를 첨삭했다.
게임하다가 화장실에서 형들이랑 담배를 피웠다. 어른이 들어오는 소리가 나서 부리나케 담배를 껐다. 갑자기 꽁초를 버릴 데가 없어서 화장실 휴지통에 버렸다. 휴지에 불이 붙어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연기가 가득차니 화재경보가 울렸다.
그 아저씨, 피시방 주인이야. 피시방에 있던 애들 몇 명만 대피한 거야. 열나 오버야. 형들은 원래 그 아저씨 양아치라 사과하기 싫다고 먼저 가버렸고...
고심이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큰통수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뉘앙스는 틀리지만.
왜 불이 났다고 생각하니
-담배 피워서...
아니, 담배를 ’피워서‘가 아니지. 담배를 ’쫄면서‘ 피워서지.
-...
쫄지 않았으면 누가 들어온다고 해서 급하게 끄지 않았을 거고, 제대로 껐는지 확인도 안된 꽁초를 휴지가 잔뜩 있는 곳에 넣지도 않았겠지.
-...
담배를 꼭 피워야겠거든 편안하게 피워.
-...
너가 너한테 피해를 주는 거, 그걸 어떻게 말리겠어. 하지만 불안 속에서 그 일을 하진 마. 불안은 너도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이후 큰통수가 담배를 피우는지 안 피우는지는 신경도 안 썼다. 다만 허둥지둥대는 일은 없는지 살폈다. 조언은 먹힌 것 같았다. 밤새워 게임을 할 때도 학교를 무단 결석할 때도 당당하고 편안해 보였으니까.
며칠을 기다렸지만 결국 아저씨한테서는 연락이 없었다. (스프링클러 호텔 포함, 다들 고심이에게 왜 그러시나요, 겁을 잔뜩 주고는 연락 한 통 없으시다니... 감사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아자씨 오버했네 어쩌네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다. 이상하게도 고마웠고, 무언가 마음가짐에서 한 단계를 넘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고심이라는 스프링클러의 센서를 건드린 건 무서움이었다.
슬픔, 분노 따위에 반응하는 건 사치였다. 그건 고심이가 안 느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무서움은 달랐다. 무서운 기분은 안 느낄 수 있겠지만 그 실체는 닥쳐오니까. 그건 전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거고, 고심이의 능력치를 훨씬 뛰어넘는 일일 테니까.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시간도 훌쩍 지났고 사건현장(?)으로부터도 이렇게 멀리 왔건만, 통수들의 뒤를 보며 걷노라면 고심이는 자꾸 상념에 빠졌다.
당시 짧은 머리로 형들이랑 어울리며 맞(?)담배를 피우던 청소년은 이제 긴 머리를 흩날리며 암스테르담 거리를 걷고 있다. 아 맑은 공기 어쩌고, 하면서.
시간은 참, 약이다. 물론 너무 거칠게 훼손되지 않은 시간이어야 한다.
고심이, 오랫동안 잘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