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브뤼셀 시내로 나왔다.
벨기에는 만화의 나라다. 만화를 단순한 오락이 아닌 독립된 예술 분야로 존중하며 온국민이 사랑한다. 만화 산업도 꽤 탄탄하다. ‘땡땡의 모험 The Adventures of Tintin’과 ‘스머프 The Smurfs’시리즈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고심이도 안경 낀 똘똘이 스머프, 투덜이 스머프, 거울을 보던 멋쟁이 스머프, 허허 웃던 파파 스머프... 파란 요정 무리들을 그리운 마음으로 기억한다.
고심이는 말랑한 기분으로 거리를 걸었다. 어디 물구나무 선 강아지나 줄행랑치는 고양이 같은 그림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며. 하지만 벨기에라고 해서 아무 데나 낙서가 있고 만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 간판 글씨 위에 검정매직으로 탑햇을 주르륵 씌워놓은 귀여운 장난도 있었지만, 브뤼셀도 다른 도시처럼 단정했다.
다만 그래피티들은 아주 많이 눈에 띄었는데, 혹시 그래피티가 합법이려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허가되지 않은 곳에 그려지는 모든 그림들이 불법이란다. 당국이 시간과 돈을 들여 열심히 지우지만 라이터들의 속도가 더 빨라서, 특히 전철이나 기차 차량들에 어김없이 그래피티가 장식(?)돼 있었다. 지저분한 것 같기도 하고, 벨기에라고 생각하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만화의 나라라는 프레임이 꽤 집요하네.
그랑플라스Grand Place 광장은 이름이 Grand Place라서 드넓을 줄 알았다. 생각보단 아담했다. 그래도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은 있었다.
“여기, 12세기에 생긴 거래.”
“12세기...면 중세? 와, 오래됐다.”
“근데 17세기에 프랑스군한테 완전 파괴됐다가 다시 지었대.”
이웃나라끼리 치고박는 거는 늘 있어 왔으니 놀랍지도 않다.
“근데 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야?”
큰통수는 별 거 없는데 하는 얼굴이었다.
보통은 넓은 역사구역 전체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그 안에 광장이 포함되거나 하는데, 그랑플라스는 광장 하나로만 지정됐다.
17세기면 서양사에서는 근대이고, 교회 권력이 쇠퇴하고 왕과 시민 권력이 힘 겨루기를 하던 때다. 이때 그랑플라스의 재건을 시 정부와 상인조합(길드)이 주도했다. 기존처럼 교회와 왕이 후원하고 간섭하는 형태가 아니라 상인들이 내돈내산으로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지은 것이다.
"그 자체가 시민 권력이 크게 성장했다는 방증이었대. 그러니까 현재의 그랑플라스는 그런 권력의 흐름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셈이고."
게다가 건축 양식도 다양해졌단다. 파괴되지 않은 시청사는 중세 고딕양식으로 두고, 나머지는 바로크와 네오고딕으로 다시 지어서 결과적으로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로운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나 집약적이고 매력 있는 광장인 것이다.
“아, 어떻게 해도 안되네.”
큰통수가 시청사 앞에서 카메라를 이리 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첨탑 장난 아니지?. 광각으로 찍든가 대충 찍어.”
건물 사진 좀 찍어본 작통수가 귀여운 훈수를 두었다.
몸통을 담으려면 첨탑이 잘리고 첨탑을 담으려면 몸통이 잘리는 모양이다. 멀리서 찍자니 다른 건물과 섞이며 존재감이 줄어들고.
“으,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어느새 큰통수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건물을 올려찍고 있었다.
“딱 걸렸네. 그게 고딕이 원하는 거야.”
“뭐가?”
“우러러 보는 거 말이야, 하하하.”
큰통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바지의 흙을 털었다. 고심이는 둘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잘 노는데? 바람직하게.
시청 건너편의 큰 건물은 시립미술관(왕의집)이다. 중세 고딕을 그리워하며 지은 네오 고딕답게 엄숙하지만, 첨탑이 덜 높아서 약간 편안해 보였다.
나머지 건물들은 길드하우스다. 현재는 내부를 개조해서 카페나 레스토랑, 협회, 박물관 등으로 쓰이지만 예전엔 상인이나 장인들의 조합 건물이었다. 다른 권력의 눈치를 안 보고 지어서인지 자유롭고 화려했다.
제일 큰 건물은 ‘브라반트 공작의 집’, 그런데 브라반트 공작이 산 적은 없다. 그저 당시 공국의 수장인 브라반트를 여기저기 장식해 주며 존중하는 제스처를 취했다고나 할까. 비슷한 맥락으로 ‘양조업자의 집’에도 꼭대기에 맥주통 대신 권력자의 기마동상이 세워져 있다.
“상인들도 정치를 해야 살아남았네.”
“예나 지금이나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여.”
바람직한 대화의 흐름.
길드하우스들은 재미있는 상징과 조각들로 개성을 뽐냈지만 한 지점에서만큼은 대동단결했다. 외벽의 화려한 금박 장식 말이다. 모든 건물이 어찌나 번쩍거리는지 햇빛에 반사될 때마다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토록 부를 과시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금처럼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시의 부는 이렇게나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나는구나.
21세기의 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보다 세련되게 드러내는 방법을 터득했고, 한편으론 은밀하고 교묘해서 더욱 공고해져가는 것 같다. 왕, 귀족, 교회, 군대, 시민... 권력은 늘 이동해왔다. 그런데 권력을 떠받치는 수단으로서의 부는 어쩌면 고정값이었는지도 모른다. 돈에게 힘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던가. 그래도..., 고심이는 그게 제일 힘이 세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심이는 한 건물 앞에서 칼 마르크스가 머물렀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여기서 공산주의 선언문을 집필했었나보다. 공산주의... 다같이 생산하고 다같이 나누자는... 이렇게 돈의 힘에 길들여진 인간에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걸까. 고심이는 조용히 지나쳤다. 통수들은 그를 잘 모른다. 이름 정도는 알겠지만 고심이만큼 큰 상징으로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과거가 돼버린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심이네가 품은 크고 작은 고민들만큼도 살아 있지 않은, 잊혀진 무엇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여름에는 온통 꽃으로 뒤덮이는 축제가 열린다는데, 시원한 맥주 축제도 있다는데, 크리스마스에는 멋진 트리와 라이트쇼가 펼쳐진다는데, 맹숭맹숭한 광장만 보고 가려니 아쉬웠다. 번쩍거리는 금박도 밤에는 훨씬 멋지다는데.
저녁에 공연이 있는지 철제의자와 음향기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덕분에 깔끔한 사진도 못 건지고 공연 또한 못 볼 테지만 광장의 활기찬 모습을 보는 건 좋았다. 멈춰 있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얘기를 나누는 곳 같았기 때문이다.
광장을 벗어나는 골목에 사람들이 웅성웅성했다. 외세로부터 브뤼셀을 되찾은 시민 영웅, 에베라르트 세르클래스 동상이 있는 곳이었다. 그의 팔을 쓰다듬으면 축복을 받고, 동상을 만지면 브뤼셀에 다시 온다는 이야기. 왕년에 로마 트레비 분수에 동전 좀 던져본 고심이로서는 세계 도처에 널린, 관광 수요를 늘리기 위한 귀여운 전설들에는 더이상 귀가 솔깃해지지 않는다. 멀찍이서 보며 지나갔다.
조금 걸으니 작은 공원이 나왔다. 바람이 살살 불었고 무성한 잎들이 흔들렸다.
"와아 날씨 너무 좋다..."
사람들도 모두 천천히 걸으며 날씨를 즐기는 것 같았다. 고심이네는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풍경이 식탁보처럼 깔린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배가 너무 고팠고, 풍경은 아름다웠고... 고심이들은 맛없어도 맛있을 준비가 다 된 상태였다.
"뭐 먹지?"
통수들은 촌스럽게 버거세트를 시켰다.
"난 뮬...프리츠."
고심이는 세련되게 주문했다. 메뉴판에서 사진이 가장 크게 나온 걸로.
버거들이 나왔고 이어 큰 냄비에 홍합이 수북히 담겨 나왔다. ‘뮬Moules’은 프랑스어로 홍합이었다. 고봉 빙수는 받아봤어도, 고봉 홍합이라니. 곁에 감자튀김이 곁들여 나왔는데, 그게 ‘프리츠Frites’다.
홍합은 화이트와인, 버터, 샬롯(shallot), 셀러리, 파슬리 등을 넣어 향이 가득한 스팀 방식으로 조리한다. 벨기에에 그렇게 홍합이 많이 나나 싶었는데, 거의 네덜란드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신선한 홍합을 수입해 와서 자신의 나라에 맞게 요리법을 개발한 것인데, 벨기에 국민 음식이라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홍합찜은 담백해서 그동안 느끼했던 입맛을 씻어 주었다. 양도 많아서 아무리 먹어도 냄비에 홍합이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껍질이 냄비보다 더 높게 쌓일 때쯤 국물이 있는 바닥이 보였다. 고심이는 홍합 국물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얼른 한 숟가락 떠 먹었는데, 으... 짰다. 한국에서의 슴슴하고 구수한 그런 국물이 아니었다.
"아 배 부른데 감자튀김은 먹고 싶어."
홍합만큼이나 수북이 담긴 감튀가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평소에 먹던 가느다란 건, 난 패스트푸드야 하듯 가벼운 느낌이 있었는데 이건 두툼해서 진중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나 집어 맛보는데, 와아... 겉은 바삭하고 속은 보들보들했다. 벨기에 감튀는 두 번 튀긴다더니. 한 번은 낮은 온도에서, 한 번은 높은 온도에서. 그러니 이런 식감이 되는 거지.
감튀를 놓고 벨기에(프리츠Frites)와 프랑스(프렌치프라이French fries)의 신경전이 대단하다고 한다. 특히 벨기에 사람들이 감튀에 진심인데, 메뉴판에 아무리 프렌치 프라이라고 적혀 있어도 꿋꿋하게 '프리츠'라고 주문한다. 벨기에 사람에게 프렌치 프라이 먹었다고 하면 고려대에 가서 연고전 왔다고 말하는, 약간 큰일나는 분위기?
어쨌든 고심이는 '프리츠'에 한표 던진다. 실제 먹어 본 프리츠가 너무 맛있었다. 통수들도 버거는 다른 곳과 비슷한데, 감튀는 압도적으로 맛있다며 엄지척을 했다.
날씨도 좋고 풍경도 예뻤지만 음식만으로도 충분히 맛있었던 브뤼셀의 점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