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4), 깃발 쫙 EU

by 리영

작통수와는 EU빌딩, 즉 버를레몽(Berlaymont)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버를레몽’은 원래 있던 수녀원 이름인데, 수녀원은 이전했지만 이름은 빌딩에 남은 거다.

“오고 있니? 우리 빌딩 앞에 있어. 파란 깃발 있는 데.”

고심이와 큰통수는 딱 봐도 건물 정면처럼 생긴 곳에서 기다렸다. EU를 상징하는 파란 깃발이 30개쯤 쫙 나열돼 있었다.

“나도 도착했는데, 파란 깃발 있는 데.”

작통수는 안 보였다.

“너 없는데?”

“나 깃발 아래 있는데...”

깃발 아래... 가려질 만한 덩치가 아닌데.

“깃발 쫙 있는 데 맞아?”

“쫙...? 흠...”

“몇 개 있는데?”

“여서, 일곱...개쯤?”

“아이구, 그게 무슨 쫙이야. 빌딩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걸어와.”

큰통수가 깃발 많은 게 자기 덕인 양 으스대더니 작통수 마중을 나갔다.

“와 여긴 깃발 진짜 많다!”

작통수가 깃발을 처음 보는 사람마냥 입을 헤 벌렸다.

버를레몽 빌딩이 그렇게 생겼다. 위에서 보면 엑스(X)자 모양으로, 호를 그리는 넓은 부분이 네 군데나 돼서 어느 쪽이 정면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두 군데는 후면 도로 쪽으로 나 있어서 주 출입구처럼 안 보인다. 나머지 두 개가 큰 도로 쪽으로 나 있는데 그 중 슈만 로터리(Schuman Roundabout) 방향으로 넓게 열린 곳이 정면이다. 무엇보다 파란 깃발이 빼곡히 걸려 있어서 여기가 EU건물입니다, 하는 티가 확 난다. 작통수가 기다린 곳은 의례상 깃발 몇 개가 걸려 있는 측면 쪽이었다. 고심이네는 재회를 기념하며 지하철 역 자판기에서 구입한 환타를 나눠 마셨다. 시원했다.


“이 동네가 EU 동네지?”

“그치, 여기가 본부고.”

“아이구 다리야...”

셋은 구석에 퍼질러 앉았다.

“근데 중요한 결정은 건너편 유로파(Europa, European Parliament )빌딩에서 한대. 저기가 본부일지도 몰라.”

“엥?”

“여기가 본부처럼 생겼는데. 깃발 쫙...”

깃발 쫙, 만 몇 번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다 이곳을 고심이네는 깃발 쫙 빌딩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EU 관련 뉴스만 봐도 이 빌딩이 자주 나온다.

“잠만...”

작통수의 손가락이 스마트폰을 바삐 오갔다.

“아, 여긴 일을 실제 집행하는 곳이고 건너편이 의사 결정을 하는 곳인가봐.”

유로파는 각국 정상들이 모여 굵직한 사안을 결정하는 결정 본부이고, 버를레몽은 그걸 집행하는 집행 본부라는 것이다. 유로파는 얼굴, 버를레몽은 실세인가? 뉴스에서 ‘EU 정상회의가 어쩌구...’하면 유로파 사진(주로 내부 회의장)을, 그냥 ‘EU가 어쩌구...’ 하면 파란 깃발 쫙 있는 버를레몽 사진을 주로 쓴다는 것이다. 정리가 좀 되네.

머리는 가벼워졌지만 몸들은 움직일 생각을 안했다. 잠시 후 작통수가 건너편 빌딩을 보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고심이와 큰통수는 가방을 맡아 준다는 생색을 내며 여전히 자리에서 뭉갰다. 하늘은 맑고 깃발은 펄럭이고, 빌딩 앞 광장에는 방송국에서 왔는지 큰 카메라 몇 대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 ‘EU가 어쩌고...’하는 뉴스가 나오려나.


작통수가 찍어온 유로파 빌딩은 꽤 멋있었다. 흔히 ‘파사드’라 부르는 빌딩 정면이 철제 프레임과 유리가 결합된 특이한 모양이었다. 철제와 유리라니,

“어머 이것도 아르누...”

“이건 아르누보가 아니옵니다. 철제와 유리가 덩굴처럼 휜 아르누보 특유의 디자인이 아니잖아. 엄연한 현대건축이야. 그리고 현대건축은 장식을 무척 싫어해.”

“그르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니까, 성질 급하네, 하하.”

고심이는 낄낄거리며 받아쳤다. 아까 시침이가 알려주려던 아르누보와 현대건축의 차이를 작통수가 정리해 준 셈이다. 틀리더래도 자꾸 적용해보고 그래야 제대로 알게 되는 거지 뭐.

“알았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던 큰통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뭘?”

“아르누보와 현대건축의 차이.”

“방금 작통수가 말했잖아. 어디 갔다 왔어?”

“아니, 겉으로 보이는 거 말고. 나는 아르누보가 왜 멀쩡한 철을 이리저리 휘었는지 궁금했거든. 얘네들은 철을 길들인 거야, 철이 너무 인간미 없는 재료라 싫었던 거지. 근데 현대건축은 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쭉쭉 직선으로 사용하잖아. 그러니까 재료를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큰 차이가 나네.”

오 이 깊이감 뭔가요.

“그런 점에서 난 현대건축에 한 표.”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란 얘긴가.

작통수가 존경의 눈빛으로 큰통수를 쳐다봤다.


“근데 이 철제 프레임 사이에 뭐가 잔뜩 있는데.”

“아 맞아. 유로파 빌딩의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야.”

“이야기?”

고심이와 큰통수는 다시 머리를 맞대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으로 확대해보니, 크고 작은 격자 무늬들이었다.

”창문 같은데. 근데 모양이 다 제각각이네. 꼭 창문 파는 회사 빌딩 같아.“

”그르게, 이런 창문도 팝니다. 저런 창문도 팝니다. 요런 창문도 있구요...“

”딩동댕!“

”뭔 동댕?“

오랜만에 들어보는 전국노래자랑 시그널이었다.

”그게 다 진짜 창틀이야. 28개 회원국들로부터 수집해 온 거래.“

자그마치 3750여 개의 오래된 창틀을 수집해 와서 직접 건물에 붙여넣은 거라고 했다.

”와... “

”왜 그랬대...“

큰통수가 신기해하면서도 장난스레 덧붙였다.

”의미를 상징하는 거지. 건물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래.“

작통수가 건축과 새내기답지 않게 어려운 말로 대꾸했다. 아니 새내기다운 건가, 서투른 진지함은.

”딱 알겠네. 회원국들끼리 의기투합해서 하나의 나라(EU)처럼 잘해보자, 그런데 획일적인 ‘통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의 ‘통합’을 지향하자. 유럽이 워낙 다양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고심이가 좀 아는 척을 했다.

”맞아 맞아.“

작통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one이 아니라 together네.“

큰통수가 간단하게 뱉었다. 이건 졸업생의 짬밥인가요.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오히려 용어 사용이 장황하고 어렵기십상이다. 깊이있게 배우면 좀 정리가 된다. 정리가 된 후의 간단함은 명쾌함에 가깝다. 뭐 큰통수가 그렇게까지 착실한 배움의 수순을 밟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통수보다는 명쾌해 보였다. 어디 면접 가면 대답은 좀 하겠는데? 불러 주는 곳이 없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기차를 탈 시간은 많이 남았고 관광하러 갈 체력은 안 남아 있었다. 빌딩 앞에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좀 더 편히 쉴 곳을 찾아야 했다. 행여 방송국 카메라에라도 잡혀 갈 곳 없는 K 떠돌이처럼 나오면 곤란하다. 근처에 있다는 유명 공원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그래서 여기가... 쌩껑... 공원이라는 거지?”

작통수가 벤치에 앉으며 물었다.

“쌩껑뜨... 공원이라니까.”

큰통수가 한 글자를 더하며 아는 척을 했다.

“맞아 쌩... 공원.”

따라붙던 두 글자를 날리고 고심이가 짧게 정리했다. 통수들이 양쪽에서 째려봤다. 브뤼셀을 떠날 때까지 온전한 이름으로 발음이나 할 수 있을까, 쌩껑뜨네흐 공원(Cinquantenaire Park)을.

불어로 ‘쌩껑트 Cinquante’는 ‘50’ ‘네르 naire’는 ‘기념하다’,는 뜻이란다. 즉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은 1830년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하나의 국가로 번듯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벨기에 국민들은 이런 공간을 선언처럼 미리 마련해 놓고, 제대로 된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생각이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공간이 생각을 굳게 지켜 주기도 하는 모양이다.

공원은 넓고 깔끔했다. 잔디도 잘 정돈돼 있고 좌우 양쪽으로 똑같은 나무 숲길도 있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게다가 영국까지...벨기에도 주변국들한테 엄청 시달렸겠다.”

작통수가 구글이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래도 잘 헤쳐온 것 같아.”

“맞아. EU에다가 NATO본부까지, 유럽의 수도라고까지 하잖아.”

“중립국으로서의 상황을 잘 이용했겠지.”

“맞아. 이런 기구들이 다른 강대국에 왕창 있었으면 또 얼마나 골치아팠겠어.”

“약점을 강점으로 사용한 거네.”

“오 예리한데.”

고심이들은 나름 보고 들은 것들을 주워섬기며 견해를 나눴다. 벨기에를 몹시 걱정하고 아끼는 관광객처럼 보였다. 몸이 편해지니 입이 저절로 친절해지고 에너지가 솟는 모앙이다. 공원 한가운데 우뚝 선 3개의 아치 개선문이, 독립 독립 독립, 하고 세 번 외치는 것처럼 존재감 높게 다가왔다.

맑은 하늘 아래, 넓은 초록 땅에, 사람도 많지 않은 곳에, 벤치 두 개를 나란히 차지하고서 느긋하게 되새겨보는 브뤼셀은 좋았다. 오랜만에 시침이와도 긴 얘기를 나누었다. 공원은 좌우 대칭에다가 각이 딱딱 맞아떨어지면서 자연스러운 느낌은 덜했지만, 무언가를 상징하기에는 충분했다. 상징의 공간도 아름다웠다. 피곤한 몸을 쉬기에도 더할 나위 없었고.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미디역에 도착했다. 라커에서 캐리어를 꺼내고 간단한 저녁을 샀다. 기차를 타고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면서 먹을 생각을 하니 어떤 음식도 맛있을 것 같았다.

“아참 와플...”

“맞다, 우리 와플 못 먹었다.”

“벨기에에 왔는데 와플을 못 먹다니...”

와플 맛집들도 알아왔는데 한 군데도 못 갔다.

“잠깐...”

위기에 반짝이는 큰통수, 와플을 구해오나요.

구해왔다. 정확히는 ‘구매해’ 왔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안 보였는데, 혼자 눈도 좋아. 실제 큰통수가 시력이 제일 좋다. 그렇게 게임을 끼고 살았어도... 세상 불공평하지, 책만(?) 열심히 끼고 산 고심이 눈이 제일 나쁘다.

“어머어머 와플 맛있다!”

“아무 데서나 샀는데 이렇게 맛있다고. 이건 인정!”

마땅히 놓을 데가 없어서 와플 하나를 좁은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나눠먹었다. 아슬아슬해서 더 맛있었나. 와플은 빵 자체가 도톰하면서도 달콤해서 별 토핑 없이 먹었는데도 맛있었다.

고심이네가 먹은 건 리에주 와플이었다. 벨기에에는 와플의 양대산맥이 있다. 브뤼셀 와플과 리에주 와플. 브뤼셀 와플은 직사각형에 큰 격자 무늬 모양이고, 가볍고 담백해서 다양한 토핑 맛으로 즐긴다. 리에주 와플은 불규칙한 타원형이고, 쫀득하고 달콤해서 토핑 없이도 이미 완성된 맛이다. 세상엔 알아야 할 게 너무 많다...


여유 있게 기차에 탑승했다. 지정 좌석이 아니라서 서서 갈까봐 한 역을 거슬러와서 탄 건데, 텅텅 비었다. 허탈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EU깃발 같은 파랑색 좌석들이 쫙, 시원하게 놓여 있었다. 이제 가만히 앉아서 국경을 지나는 것을 보기만 하면 된다.


벨기에라는 나라를 겨우 콩알만큼 구경하고 간다. 구경했다고 하기도 민망하지만 그 콩알을 입안에서 천천히 굴리다가 돌아가서 좀 더 공부하며 여운을 갖는다면, 콩은 어느새 줄기 하나 정도로는 자라주지 않을까. 부랴부랴 하는 여행은 그렇게라도 후속 조치(?)를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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