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1993, 중국, 천카이거)
패왕별희는 급진적으로 쇠퇴하는 시대 속에서도 꿋꿋이 절개를 지킨 이의 안쓰러운 작별을 그린 작품이다. 패왕별희 속 나타나는 중국은 급진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중일전쟁,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시기를 거치면 거칠수록, 경극을 관람하고 연출하는 이들의 수준과 의식은 계속 낮아지고 만다. 그럼에도, 도즈는 전통적인 경극을 유지하고자 애쓴다. 그는 꿋꿋이 절개를 지키지만 결국 시대로부터, 그리고 개인으로부터 배신과 야유를 떠받고 작별한다.
벽돌, 자살, 집단, 장국영. 이 네 단어는 패왕별희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라 본다. (자살 대신 작별, 혹은 이별과도 대체 가능하다.) 벽돌은 변화를, 자살은 절망과 해방을, 집단은 시대를, 마지막으로 장국영은 도즈 그 자체를 의미하며 대표한다.
시투는 총 네 번 벽돌을 자기 머리에 깨부순다. 관객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쟁취하기 위해서, 일본군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홍위병들에게 자신을 증명시키기 위해서. 시투의 모든 벽돌 깨기는 불합리에 맞서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 수단은 통하지 않고 잘못되었다는 걸 마지막에서야 시투는 깨닫는다. 사부는 머리에 벽돌을 깨는 시투를 다그쳤지만, 시투는 마지막에서야 그 잘못된 행위를 인지한 것이다. 머리로는 절대로 모든 종류의 벽돌을 깰 수 없다. 언젠가 머리는 벽돌에 굴복해야 한다. 결국 굴복에 맞서기 위해 행한 행위가 굴복된 시투는 자신에게 찾아온 현실에 굴복하는 인물로 변화해 버린다.
자살은 견디기 힘든 절망이 원인이 되어 행해진다. 즉, 절망 속에서 해방하기 위해 행한다는 말과 같다. 자살한 인물은 라이즈, 주샨, 그리고 도즈로 총 세 명이다. 라이즈와 주샨의 자살은 절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도즈의 자살은 해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라이즈는 사부의 억압을 탈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꼈고, 주샨은 기회주의적으로 변화한 시투에 절망을 느꼈다. 심지어 그런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본인임을 깨닫고 얻었기에 절망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나 도즈의 자살은 그동안 자신을 억압해 온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한 자살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으로부터, 신문화의 파괴 행위로부터, 내면의 질투심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도즈만이 자살하기 직전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절망과 해방의 차이이다.
장국영이 도즈 그 자체를 대표한다는 사실의 이유는 설명하지 않겠다.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장국영, 그도 해방이 간절했을 거란 생각. 그의 정체성으로부터, 저널리즘의 파괴 행위로부터, 내면의 부담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도즈가 장국영이라면, 시투는 천카이거이다. 그리고 천카이거의 벽돌은 영화다. 그의 영화는 본래 자기표현의 예술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턴가 영화라는 수단으로 모든 불합리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에 굴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투를 동정하면서도 동시에 비판했던 이는 천카이거 본인이 아닌가. 자신이 깼던 벽돌을 다시 바라보고는, 다시 한번 도즈처럼 경지를 뛰어넘는 인물이 되자는 의미를 담은 영화가 패왕별희 아닌가. 그런 그의 몰락이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한심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집단을 짚고 넘어가겠다. 집단은 곧 그 시대를 대표한다. 패왕별희 속에서도 일본에 저항했던 집단, 국과 공으로 나뉜 집단, 선동에 휩쓸려 문화를 파괴해 버린 집단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집단들은 당대 시대를 대표한다. 그 집단들은 무서우면서도, 걷잡을 수 없어 보인다. 그 강도는 점점 심해진다.
이를 보며 현 우리나라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시 깨닫는다. 극단적 정치주의자의 선동과 그에 휩쓸리는 집단. 그리고 그 집단이 파괴하려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가치. 그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가 다시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