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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Jan 15. 2016

외롭지 않은 순간들

1. 사랑의 표현




사람이 사랑을 표현하는 능력에는 다양한 방법과 표현의 크기가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백의 힘을 들여 하나 정도의 표현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백의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내 친할아버지는 후자의 표현능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중풍으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쓰러지신 뒤,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늘 방에 눕거나 앉아서 나를 맞이해주셨다. 방에 들어서면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며 오- 영지 왔구나, 라고 하셨다. 그냥 그 한 문장일 뿐인데 나는 할아버지가 좋아 그 방에 앉아있곤 했다. 

   

어린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할 말은 늘 없기 마련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공부는 잘 하니,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내니 등등 다른 화제를 애써 꺼내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랑 나는 그냥 앉아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나는 가끔 그 침묵이 어색해 웃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원을 그리기도 했고, 할아버지는 그저 지켜보셨다. 그때는 어려 알지 못했지만, 아마 할아버지와 나는 서로 영혼이 통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언젠가는 댁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방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다. 떨리는 손이 불안해 보여 젓가락으로 반찬을 얹어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내 눈을 보고 웃으셨다. 식사를 잠시 멈추시고, 웃으셨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웃으셨다.    

정말 그냥 웃으셨을 뿐인데 나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공기방울이 뻥-하고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것 같은 그 순간의 분위기와 넘어갈 듯 말 듯 주황빛으로 창문에 걸린 햇빛, 끝이 날렵하게 휘어지고 짙은 할아버지의 눈썹(지금 생각해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참 멋졌다), 입고 계셨던 흰 셔츠와 앞에 놓인 작은 밥상. 그리고 옆

에 앉아 ‘영지가 다 컸구나’ 하고 기분 좋게 웃던 아빠의 표정까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꼭 십 년이 지났다. 이상하게 요즘 들어 그 날 그 오후가 자주 생각난다. 그리고 그 때 그 조용했던 방에 할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가득 찼었는지 느껴진다. 사람은 참 작은 기억들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사랑한다거나 그와 비슷하고 의미는 조금 약한 어떤 말씀도 하신 적이 없는데, 난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니. 마음이란 요란하게 표현한다고 전해지는 것이 아니구나.    



그 날이 생각날 때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잘 웃는데, 그 때 할아버지께 한 번 더 활짝 웃어드릴걸. 할아버지도 내 마음을 그만큼 느끼셨을까 하는 아쉬움도 물론 함께 찾아온다. 나는 아직도 백의 안간힘을 들여 하나를 표현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그렇게 힘들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 내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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