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경력 1064일째
밤마다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작은 소리로 귀에 대고 기도를 해준다. 이서와 이한이가 둘 다 깨어 있을 때는 큰 소리로 번갈아 가며 기도한다. 앞으로 이 아이들이 선한 길에 서서 용감하길, 지금처럼 엄마가 매 순간 함께할 수 없을 때에도 안전하길,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길, 그래서 외롭지 않고 자기 재능을 일찍이 발견하여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길 등 여러 가지를 기도하지만 특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용납하고 용납받길' 자주 기도한다. 나는 아이들이 잘 사랑하고 잘 용납하길 바란다. 그건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한다. '잘' 사랑하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리고 갈등과 문제를 겪었을 때 타인을 용납하는 것도 엄청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해냈을 때 오는 만족과 행복은 이 아이들의 몫이다.
하지만 지난 몇 주간 나는 이서를 용납하지 않았다. 사랑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저렇게 소리 내 기도하면서도 그랬다. 산후조리가 끝나고 시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간 5월부터 방학 내내, 그리고 이어진 이번 학기까지 우리 부부는 너무 바빴다. 남편은 늘 사역과 알바, 공부에 치였고 나는 그런 남편에게 시간을 만들어주느라 늘 아이들을 달고 집안일을 했다. 삶은 너무 팍팍했다. 아무리 내 아이가 귀하고 예뻐도 이렇게 정신없이 매일을 살아내는 데에는 몸도 정신도 너무 닳곤 한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나가던 시월에 나는 이서에게 잔인한 엄마가 됐다. 사소한 것에도 잔소리를 시작했고 비난하고 비꽜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전에는 잘 타이르던 것들도 곧바로 다른 방으로 데려가 혼자 있으라며 윽박지르고 아이가 공포심에 엄마 말을 따르게 했다. 아이 둘을 돌보며 모든 일과에 시간과 힘이 부족했고 그렇게라도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가 너무 미웠고 이런 상황이 미웠고 이런 상황을 만든 남편도 미웠다. 우리는 아이 앞에서 그럼 네가 애들 봐라, 그럼 네가 나가서 돈 벌어봐라 하는 유치한 싸움도 했고 이서는 훗날 아빠가 엄마랑 얘기할 때 돈 가져오라고 해서 엄마가 진짜 갈까 봐 겁이 났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로 이서에게 내 바닥까지 모두 드러냈다. 이서는 엄마가 너무 좋고 또 엄마가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 부엌, 세탁실, 화장실이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도 애착 옷(내 옷)을 붙잡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그런 모습조차도 짜증이 났다. 그만 따라와. 엄마 그만 따라와. 그만 따라오랬지!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해!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며 다른 방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옷을 갈아입히려 벗겨놓고는 그렇게 달아나 이서는 살을 다 드러내고는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뒤에 멀찍이 서서 바라봤다. 나는 그런 아이를 안아주지도 않고 빨리 준비해야 하는데 네가 느리게 굴어서 그렇다며 또 비난했다.
며칠 전 이서와 이한이를 모두 재우고 나의 이 망가진 성격과 육아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내가 다다른 결론은 육아법을 머릿속에 넣는 것만으로 이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내 말이나 행동을 교정한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다시 안 오는 건 아니었다. '이 시간은 나중에 그리울 거야'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거나 '친절하자, 이서에게 귀 기울여주자' 같은 메모를 써두는 걸로는 해결이 안 됐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의 죄성이 아이의 무지한 죄성과 부딪히고 있는 거였다. 나는 필립 얀시의 '용서: 은혜를 시험하는 자리'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 사람이 먼저 나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서는 이런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으려면 내가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책은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은혜의 비유 중심에는 우리를 향해 주도권을 쥐도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탕자를 맞으러 달려 나가는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 종이 갚기에는 너무나 큰 빚을 탕감해 주는 주인, 한 시간 동안 일한 품꾼을 종일 일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는 고용주, 대로변 샛길가로 자격 없는 손님을 찾아 나서는 잔치 주인.
하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최악의 대우를 당하신 뒤 그 잔혹 행위를 오히려 인간을 위한 구원의 길로 삼으심으로써 죄와 보복의 냉혹한 율법을 파하셨다. 정의와 용서 사이의 진퇴양난을 갈보리가 해결한 것이다. 예수님은 정의의 모든 혹독한 요구를 친히 그 무죄한 몸에 지심으로 비은혜의 사슬을 영원히 끊으셨다.
- p.87
은혜는 주체적인 것이었다. 그 은혜를 베풀고 싶어 찾으러 나서고 감히 종이 부탁하지도 못할 빚을 갚아주고 나를 버리고 내 재산을 탕진한 아들이 갈 곳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돌아올 때 매일같이 목 빼고 아들이 올까 기다리다 달려 나가 끌어안아 주는 아버지. 이 장을 읽으며 나는 펑펑 울었다. 나는 엄마이면서도 이서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이서가 아이라서 잘 못 하는 것을 당연하다 여겨주고 지금까지 늘 기다리고 이해해 줬던 것들, 애정 넘치게 바라봤던 눈길, 쓰다듬어 주던 손길,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엄마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던 목소리도 다 버리고 아무런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그 몇 주간 이서가 얼마나 겁이 나고 사소한 모든 것을 조심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서는 그런 나를 매일 용서했다. 이서는 매일 나를 사랑했고 밤이면 '엄마, 무서워. 내일은 화내지 마?'하고 잠들고는 아침이면 '엄마, 이서 엄마랑 같이 놀고 싶어. 엄마 옆에 눕고 싶어'라며 내 침대로 올라와 곁에 누워 내가 덮어주는 이불속에 들어오는 걸로 위안을 삼았다. 점점 눈치 보고 웃음이 없어진 이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내가 고쳐야 할 것은 드러나는 말과 태도가 아니라 내 안에 은혜와 감사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을 완전히 고쳐 먹었다. 이건 은혜의 문제였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맡겨진 이 아이들에게 그것을 흘려보내는 문제였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모든 일에 심호흡을 했다. 두 아이의 먹고 자고 노는 모든 시간을 지키느라 허덕이던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움직였다. 이서와 이한이가 엄마를 찾을 때도 빨리 해결해 주려 동동거리던 것을 멈추고 다른 한 명이 좀 더 울거나 기다리더라도 천천히 해결해 주며 대신 상냥하게 기다려 달라고 말을 해줬다. 약속 시간에 좀 늦거나 설거지가 좀 밀리기도 하고 밥 먹는 시간이 늦어지기도 하고 밥을 먹다말고 낮잠을 자기도 했지만 이서는 훨씬 행복해졌다. 나도 그랬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더 악랄한 인간이 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건 감추고 묻어뒀던 내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뿐 나는 같은 사람이다. 오히려 나의 모자란 것이 드러나면서 수치스럽고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아질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어제보다 나은 엄마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