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경력 1477일째
많은 양육자들이 첫 아이를 키울 때는 전전긍긍하던 것들이 둘째를 키울 때 훨씬 쉽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이것은 실제로 이미 경험해 봤기에 기술적으로 더 쉽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예상이 가능해져 그렇다. 신생아를 기를 때는 기술적으로 편해지지만 좀 더 크면서 둘째들은 알아서 각자의 살 방법을 찾아가기도 한다. 내 경험으로는 실제로 둘째 이한이는 엄마가 자신에게 백 퍼센트 집중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첫째 이서는 갓난아기일 때도 혼자 모빌을 보거나 놀기보다 엄마를 눈으로 쫓아다녔고 앉고 기고 걸으면서 내내 엄마를 쫓아다니고 보이지 않으면 울었다. 이한이는 타고난 성향이 독립적이기도 했고 누나가 엄마를 독차지하는 동안 혼자 굴러다니고 엄마가 살림하는 동안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다양한 물건이나 책을 관찰했다. 그렇게 네 돌이 되도록 엄마 놀자, 엄마 이것 봐, 엄마를 하루 오백 번은 부르는 이서와 달리 혼자 잘 노는 이한이를 키우는 일은 훨씬 쉽게 느껴졌다.
그런 둘째가 생겼다 해서 첫째를 키우는 일도 쉬워지는 건 아니다. 첫째는 늘 어렵다. 신생아 때는 신생아라서, 걸으면 걸어서, 유치원을 처음 갈 때도, 그 어떤 규칙이나 예절을 가르칠 때도 늘 어렵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때마다 이한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도 많았다. 이유식을 잘 안 먹어 매 끼니마다 새 이유식을 만들어 따뜻한 밥상을 대접해야 했고 돌이 다 돼도 새벽에 우유를 찾아 끊는 데 애먹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육아에 쓰는 나의 모든 에너지 중 70%는 이서에게 썼다. 이서는 수없이 엄마를 부르고 늘 대화할 상대를 원했다. 이제 정말 밥 좀 차리자고 이서를 부엌 밖으로 보내면서 그렇게 끙끙대는 동안 이한이를 들여다볼 시간은 별로 없었다. 정말로 둘째는 쉽게 키우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이한이에게도 마의 18개월이 찾아왔다. 17개월 말부터 시작된 떼부림은 21개월에 들어선 지금도 끝날 줄을 모른다. 엄마를 찾지 않던 아이가 화장실 문을 닫으면 두드리고 계단을 혼자 올라가길 좋아하던 아이가 꼭 안겨 올라가겠다고 팔을 뻗고 '안아'를 외친다. 밥도 먹지 않고 간식이 들어있는 창고 문 앞에 서서 울고 수많은 물건 중 어떤 것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기 맘을 알아내라고 드러누워 운다. 물 하나도 '물'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걸 엄마가 알아낼 때까지 운다. 그네를 타다 집에 가야 해서 내리면 울고 마트에서 원하는 것을 잡지 못해서 울고 식당에서 앉아 있기 싫어서 운다. 말을 아직 잘 못할뿐더러 말할 수 있는 단어도 말하지 않고 일단 악을 쓰니 이성적인 접근이 어렵다.
이서도 약하지만 이런 때가 있었다. 이서는 이때 이미 짧은 문장을 말할 수 있었다.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이서는 원하는 것을 말하고 나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대안을 줄 수 있었다. 21개월 이서는 지금의 이한이보다 몸도 작고 더 가벼운 작은 아기였지만 말을 잘하고 잘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훨씬 어려운 훈육을 지났다. 숫자를 세며 지금 하는 것을 멈춰야 하는 때도 배웠고 타이머 소리를 듣고 멈추는 것도 배웠다. 나와 남편은 그런 이서에게 알맞은 거라 생각하며 말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가르치고 타이르고 때로는 눈물을 쏙 빼도록 혼냈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이서보다 훨씬 어려운 아기를 키우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이서를 키우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같았다. 그렇게 순하고 가르치기 쉬운 아이였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서가 어디 가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 아주 단호하게 혼냈고 이서는 큰 굴곡 없이 모범적인 아이로 자랐다. 나는 그 작은 아이에게 아주 높은 기준을 대고 있었던 거다.
오늘 만난 선배 엄마는 자신이 첫째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동일시하는지 말했다. 딸 둘을 키우지만 둘째는 그저 귀엽고 첫째는 너무 사랑한다고. 그렇기에 첫째가 더 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혼내고 가르치는지 말했다. 그의 남편은 그런 그에게 말했다. 아이가 자라며 자연스레 고쳐질 것은 부러 말하지 말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 나도 이한이는 마냥 귀엽고 엄마를 잘 찾지 않는 아이가 와서 안아달라고 할 때면 그게 그저 귀엽다. 떼를 쓰면 힘들지만 그것도 그때뿐이니 시도 때도 없이 엄마를 찾는 것보다 훨씬 쉽다. 하지만 이서는 나에게 너무나 특별하다. 첫 아이는 엄마에게 처음이기 때문에 너무나 깊은 사랑과 고민이고 그래서 엄마가 아이를 동일시하기 쉽다. 아이가 바르고 흠 없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기를, 엄마가 너무나 바라게 되는 거다. 그래서 첫 아이를 키우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첫 아이가 자라고 변하고 겪는 모든 질풍노도 앞에서 엄마는 쉽게 좌절하곤 한다. 그 사이 둘째는 엄마의 적당한 무관심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결핍이 결핍인 줄도 모르고 자라는지도 모른다.
나는 오랜만에 육아 서적을 꺼내 들었다. 이서를 이만큼 키우는 동안 수 없이 들여다봤던 책과 전문가 영상을 이한이를 키우며 찾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한이에게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며 지금 발달 상태에서 이런 행동들이 나아지려면 양육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찾아봤다. 답은 '적절한 무관심'이었다. 울음으로 뭔가를 표현할 때는 반응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렇게 했을 때는 확실히 반응해 주는 것. 아, 이서가 이때를 지날 때 나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쩔쩔매고 반응하곤 했다. 나는 이서에게도 부탁했다. 이한이가 울 때 엄마가 이한이가 그치도록 기다려줘야 하니 이서도 울음을 잠재우려고 얼른 쪽쪽이를 갖다 주는데 이제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다. 지금도 이한이가 엎어져서 울면 이서가 다가와 귓속말로 쪽쪽이를 갖다 줄까? 묻곤 한다. 나도 이 시끄러운 울음을 빨리 잠재우고픈 마음을 참는다. 이한이는 아무런 대안이 없이도 점점 떼를 그치고 엄마에게 다가와 안겨 울음을 가라앉힌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힘을 빼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 귀가 괴로워도 울음을 참아주고 내 몸이 귀찮아도 힘껏 놀아주고 더 잘 키워보겠다고 가르치고 잔소리하고 통제하려는 그 모든 것을 참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너무 귀여운 아이는 귀여운 그 자체로 무심해지고 너무 사랑하는 아이는 그래서 잡으려 드는 나의 연약함에 진절머리가 난다. 과연 나는 이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정말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아이가 자라는 만큼 부모도 자란다 해도 그 사이에 나의 과오가 아이에게 남기는 상처를 우리 모두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풍선처럼 부풀면 뇌가 멈추는 것만 같다. 그렇게 머리에 쥐가 나도 이서는 엄마 놀자를 외치고 이한이는 뒤로 누워 울고 있다. 소음 속에 거실은 말할 것 없고 화장실과 침대 틈까지 장난감이 가득하고 빨래와 설거지가 쌓인 나의 하루. 이서가 그린 그림처럼 삐뚤빼뚤하고 이한이가 흘리는 물처럼 대책 없지만 이게 나의 일상이다. 하지만 처음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던 그림이 점점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찾아가는 것처럼, 열 번이고 옷과 바닥에 흘리며 마시던 물을 점점 능숙하게 마시고 멋지게 탁자 위에 컵을 올려놓게 되는 것처럼 나도 고민하고 공부하며 조금씩 그럴싸한 엄마가 되어가는 거라 믿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는 단 하나뿐인 엄마다. 이 아이들을 지금 이 상황에서 이 방식으로 키우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처럼 잘해보겠다고 힘쓰는 엄마에게 특효약은 딱 하나. 힘을 빼는 거다. 눈을 가늘게 뜨고 더러운 집을 흐릿하게 보고 울음소리가 시끄러워도 천천히 다가가고 엄마 놀자고 외치는 아이에게 집안일은 잠시 잊고 그냥 몸을 맡기고 한 판 놀아주는 것. 내일의 나는 아이들에게 좀 더 편안한 엄마이길 바라며 이 늦은 시간 다짐을 적는다. 내일의 나는 아무리 귀가 터질 것 같아도 뇌가 멈추지 않길 바란다. 내일의 나는 정신이 빠지다 못해 화가 나도 크게 숨 쉬고 침착하게 말하길 바란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