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물길에 타오른 종이는 저를 잃었다.
비가 오는 날이 좋았다. 그렇다고 끈적이는 습기와 후덥지근한 여름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시원한 실내에 앉아 있으면서 혹은 처마에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는 마루에서 밖에 떨어지는 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처연하게 내리는 빗물들은 복잡하던 머리를 정리하며 힐링이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은 고요함 속에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도 많이 없고 지저귀는 새나 뜨거운 햇볕도 없었다. 검회색의 구름만 나를 에워쌀 뿐이고 이따끔 들리는 천둥 번개 소리만이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 날은 대개 감정의 사진을 찍기가 좋은 날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내 마음의 심상이 맑게 비쳤고 오로지 그 곳에만 집중이 가능했다.
비가 오는 주말 오후, 대청소를 하는 겸 전에 받은 여러 편지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나는 연애할때나 일상에서도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주저리주저리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기를 좋아했다. 꼭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부모님이나, 인사이동이 이뤄져 헤어지게 된 직원 동료에게도 종종 편지를 썼다. 말로는 직접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글로 담아 내기 좋아했다. 서운했던점부터 고마운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등 편지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런 여러 편지들 중 하나가 배란다로 날아갔고 비가 오던 중에 물방울이 투둑 그 위로 떨어졌다. 한 두 방울 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더 많은 물방울이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물방울은 ‘톡’ 하고 편지에 떨어지면서 마치 눈꽃 모양으로 퍼졌고 이내 종이에 흡수되었다. 하얗던 종이는 조금은 진한 하얀색의 종이로 바뀌었고 잉크는 글자의 모서리가 뭉개지며 번져갔다. 얼른 편지를 옮겨 말리기 시작했다. 흐린 날이라 하루 정도는 꼬박 방에 두어도 마르지 않아 햇볕에도 두고 바람도 쐬이며 말렸다. 하루 이틀 정도가 지나고 언뜻 보니 비를 맞기 전의 편지와 다른 점이 없는 편지였다. 하지만 가까이 보면 쭈글쭈글하고 잉크는 번진 채로 말랐으며 물방울이 튀긴 부분은 까슬까슬하게 종이가 일어나기도 했다.
편지에 기억이 담겼다. 누래진 종이, 찢겨진 스티커 등 많은 나이테를 품고 있는 편지에 나이테 한 줄을 더 새겼다. 편지의 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한 번 스쳐 지나간 물방울에 아무리 숨기려 한 들 그 기억은 숨길 수 없는 기억이 되버렸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말이다. 불에 타서 재가 되어야만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하얗고 멀리서보면 동일하지만, 하나의 나이테속에 이제 쭈글거림과 번짐이 담긴 편지는 멀쩡한 척을 하고 있다.
짧은 시가 비에 젖는 날이면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종이에 담긴 잉크도 번져와
투명한 수목이 그려진다.
물방울 뚝뚝 떨어지면
야금야금 타오르는 흰 종이
꽃 모양 일지언정
한 번 물길에 타오른 종이는
저를 잃었다.
하얘보여도 허옇고
매끈해보여도 뻣뻣했다.
도둑과 같이 지나간 물길에
홀로 안도하던 한숨은
이젠 건조한 열기되었고
말라가는 종이
쭈구렁 구김살을 숨기기 바쁘다.
번지는 줄도 모르게
야금야금 차오르는 물방울에
(혹은 어떤 색의 물감들에)
내 한 켠의 빈 종이는
물들어가는지
혹은 불타오르는지
이미 하얗게 재가 되었는지
구김을 숨김 채로 있다.
Memo: 오늘의 끄적임. 비가 오기 시작합니다. 각자에게는 스쳐 지나갔거나 혹은 이미 흡수해서 말라버린 물방울들이 있겠죠. 유심히 봐야지만 보이는 그 부스럼들 혹은 자랑스러운 데코레이션일수도 있겠습니다. 불길에 타지 않음에 안도하며 지나간 물길 속에 재로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자국을 남긴 물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