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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잎클로버처럼 Mar 17. 2021

사십춘기, 나는 변화가 필요했다.


아등바등 고군분투


“띵동~~~” 문자가 왔다.

“오늘 현장견학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잘 다녀왔습니다.(사진과 함께)” 선생님께 단체 문자가 온 것이다.

‘오~마이 갓~! 오늘이 현장견학일 이구나??’

‘깜빡했다. 안내문에서 본 것 같았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김밥 먹는 날인데,,, 김밥을 못 챙겨줬네... ㅠㅠㅠ’

부랴부랴 마음이 급해진 일정표와 알림장을 찾아봤다. 클래스팅에 공지사항이 올라오는데 내가 놓친 것이다. 나는 뒤늦게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 선생님... 제가 오늘 현장견학일 인 줄 모르고, 아이 도시락도 못 챙겨 보냈네요. 김밥 가장 좋아하는데 너무 속상해요. OO이 오늘 어땠나요? ㅠㅠㅠ ”

“어머니, OO이 친구들이랑 김밥 나눠서 맛있게 먹었어요. 너무 씩씩하고 쿨 하던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장견학 잘하고 하교했어요.”

속상해하거나 풀이 죽어있는 그런 반응이 아니라 너무 씩씩하고 쿨 했다고 말씀해주셔서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나의 실수에 대한 자책과 미안한 마음은 잠깐 뒤로 하고 다시 업무를 한다.


“띠리링~~~~” 전화벨이 울린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초등학생 초보맘은 학교에서 전화만 오면 두근두근한다.

‘어? 선생님이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일까? 내가 뭘 또 놓쳤을까?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왜 했을까? ’

그 짧은 시간에 수십 가지 질문을 챙겨본다. 그러던 사이 찰나에 답을 찾는다. 아뿔싸.

“앗! 선생님 혹시 오늘 상담시간인가요? 제가 캘린더에 상담 일정을 일주일 뒤로 표시해 놓아 버렸네요. 어떡하죠? 선생님. 오늘은 휴가를 낼 수가 없어요. 너무 죄송해요... ㅠㅠㅠ”

“네. 어머니. 바쁘시면 전화 상담으로 하셔도 되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선생님 시간 되시는 날로 무조건 맞추겠습니다. 만나 뵙고 상담하겠습니다.”

“네, 어머니. 저도 뵙고 싶었습니다.”

무슨 정신으로 아들의 초등학교 관련 일정을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지,,, 조금 한심스러웠으나 그 기분은 잠깐 뒤로 하고 다시 업무를 한다.


“띠리리링~~~~” 또 전화벨이 울린다.

“안녕하세요. OO이 어머니이신가요? OO반 돌봄 교사입니다.”

“OO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웅덩이 있는 곳에 발을 디디면서 넘어져서 온몸이 젖어버렸어요. 하필 어제 비 와서 물이 많은 곳이었어요. 아이 옷 챙겨서 지금 와 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아~~~~ 네. 가야죠. 근데 지금 당장은 급한 일로 못 가고 조금 시간이 걸리는데요. 여기에서 가는 거리도 길어서 도착시간이 한 시간 이상 될 거 같아요. 어떡하죠?”

“아~~ 그러신가요... 그러면, 일단 양호실에서 누워서 쉬게 할게요. 도착하면 전화 주세요.”

전화를 끊고 보니, 곧 있으면 태권도 학원 가야 할 시간이다. 관장님께 전화 걸어 아이의 상황 말하며 오늘은 못 갈 거 같다고 말했더니

“어머니께서 지금 바로 못 오시는 거 같으니 저희가 젖은 옷 갈아입힐 태권도복을 가져다주겠습니다. 태권도 끝나고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주겠습니다.”

“앗! 정말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관장님~~~~~~”

관장님의 도움으로 나는 잠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억울하다.

왜 나만 이리 아등바등, 안절부절못해야 하는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워킹맘, 독박 육아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에 품어 본 생각일 것이다.

일일이 다 열거하지 않아도 저마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들이 넘쳐날 것이다.







사십 즈음, 나는 몸도 마음도 삐거덕 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서있지도 못하고 앉아있지도 못하고 누워있기도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영영 일어설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벼랑 끝으로 간 것 같은 허무함과 찌릿찌릿 타들어가는 거 같은 통증의 고통이 섞여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었다. 몇 해 전 남편도 디스크 파열로 많이 고생 중인데 혹시 나도 그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건가? 그럼, 이제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지?


다행히 치료받으며 차차 좋아졌지만 이를 계기로 나는 가족과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근본적인 질문들이 시작되었다.


나는 행복한가?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가? (지금 이 꼴을 하고도?)

나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이렇게 나의 사십춘기는 조금씩 시작되었다. 거센 풍랑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목표를 잃고 잠시 방황하는 나에게 이정표가 필요했다. 집-회사-교회의 삶뿐이었는데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내가 보였다. 나를 일으켜 세워줄 열정과 목표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아이 하나와 아이 둘은 또 달랐다. 어린이집,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또 달랐다. 조금 더 젊었을 때와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는 또 달랐다. 결혼 후 6~7년을 주말부부를 하면서 연고 없는 곳에서 일과 육아를 하며 석사를 마칠 때까지는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하루하루 치열하게 정신없이 살았지만 나는 뭔가를 놓치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 모른 채 하루 24시간의 대부분을 일과 육아에 혼을 빼놓았다. 넘쳐나는 시간 중 ‘오롯이 나’는 서서히 사라졌다.


퇴근 후 집은 늘 아수라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것들을 했는지 모르겠다. 젊으니까? 열정이 있어서? 정말 하루하루 주어진 순간을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르고 싶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었다면 더 버텼을 것이다.


언제까지 더 버틸 수 있는가? 버틸 힘에는 달콤한 사탕이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달콤한 사탕은 보이지 않았다. 늘 웃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진짜 나는 점점 시들어 가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맞는 걸까?

지금 행복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인가?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아이들이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사십춘기, 나는 변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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