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연지 Oct 17. 2021

차(茶) 밭의 커피 향, 마오콩셴 카페

안개가 짙은 날에는 보고 싶은 눈앞의 풍경만 천천히 보면 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는, 혹은 있었던 장소를 차용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타이베이의 전철 노선 중 가장 낭만적인 노선은 갈색으로 표시된 원후선이다.

놀이동산 천장을 돌아다니는 관람차처럼 앙증맞은 차량이 고가 철도를 따라 도시의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리기 때문이다. 빌딩 사이에 지어진 갈색선 역사에서 곧게 뻗은 타이베이 푸싱난루를 달리는 노란 택시들을 보고 있자면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속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지은은 주말인 오늘 새벽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따안 공원 근처 주말 꽃 시장에서 카페의 테이블을 장식할 꽃들을 한 아름 사들고 갈색선으로 환승하며 놀이기구를 타듯 맨 앞자리 차창을 차지하고 앉아 빌딩 숲을 유유히 가로지르며 달리는 그 풍경을 감상했다. 전철 안은 한적하고 도시는 늦잠이라도 자는 듯이 조용하다. 한 팔 가득 안은 꽃들의 냄새가 열대 지방 특유의 눅눅한 냄새, 에어컨 냄새와 섞여 새삼 이곳이 타이베이구나 싶다.

갈색선 역에서 바라본 타이페이 풍경

  처음 타이베이에 카페를 차린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물었다. 타이베이가 뭐가 그렇게 좋아 가게까지 차리고 자리를 잡냐고. 사실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지은은 지금도 어떤 분명한 문장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지은의 머릿속에서는 늘 이 풍경을, 눅눅한 바람에 실려오는 길가의 자스민 향기를 떠올렸었다. 타이베이의 싫은 점을 물어봤을 때도 이 눅눅한 습기라고 대답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 하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을 엄마에게 지은은 이제 막 송산공항 옆을 비켜가는 전철의 차창밖 풍경과 꽃다발을 함께 사진 찍어 보냈다. 이 갈색선 전철을 탈 때면 지은은 언제나 엄마와 처음 타이베이에 여행 왔을 때가 생각났다.


  갈색선은 위로는 송산공항, 아래로는 타이베이 동물원에 가 닿는다. 엄마와 타이베이를 처음 방문하던 그 해 2월, 동물원은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그저 동물원 역에서 조금 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마오콩’이라는 곳에 분위기 있는 찻집이 많다는 정보만 듣고 이 원후선 종점까지 갔었다. 타이베이의 우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둥 마는 둥 했던 축축한 그날의 날씨 덕에 둘은 케이블카에 앉아서도 발아래 안개에 덮인 차밭을 구경해야 했다. 관광을 하기에 좋은 날씨는 분명 아니었지만 산비탈마다 펼쳐진 차밭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더라도 어쩐지 뿌연 안갯속에 옅은 차향이 배어있는 것만 같아서 이건 이것대로 좋구나 했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마오콩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었다. 산들산들 산바람이 불기는 했지만 안개를 밀어내 주기는 역부족이었다. 엄마는 늘 바람이 많은 곳을 좋아했기 때문에 습하긴 해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며 긍정적이었다. 조금 걷다 보니 노란색 귀여운 조명이 달린 커피 봉고 카페 마오콩셴이 나왔다. 마오콩셴은 고양이의 공간이라는 ‘마오콩’ 에 ‘한가할 한’ 자가 한 글자 더 붙는다. 마오콩에서 누리는 한가함, 여유. 이렇게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겠다 싶다. 커피와 차를 만들 수 있는 봉고 차 한 대 덩그러니 세워놓고 산비탈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테이블 몇 개 둔 것이 전부인 커피숍이었지만 엄마는 자신이 마치 봉고차 커피숍을 끌고 세계를 누비며 여행하는 여행가라도 된 것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어쩐지 아주 신이 나있었다.


철제의자에 앉아 지은은 카메라부터 꺼내 안개에 둘러싸인 커피숍 풍경을 찍어댔다.

 

[아깝다. 안개 아니면 저쪽으로 타이베이 101빌딩도 보인대. 저녁까지 앉아 있으면 불 들어오는 것도 보이고.]

희뿌연 화면이 대부분인 사진들을 아쉬워하며.


[야, 구름 속에 앉아 있는 것 같고 좋다 이건 이것대로.]

아쉽다는 지은에게 엄마는 정말로 구름 속에 앉아있는 것처럼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라테랑 코코넛 토스트 나왔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뿌리고 간 산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큰한 코코넛 토스트와 따뜻한 라테가 반갑지 않을 리 없었다. 엄마는 따끈따끈한 빵이라면 무조건 좋아한다. 두툼하게 자른 식빵에 버터를 발라 연유와 코코넛 잼을 얹어 구워낸 토스트는 당연하게도 엄마를 사로잡았고, 지금까지도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가끔 그 코코넛 토스트 이야기를 꺼냈다. 타이완 달러 55원. 한화 2000원이 조금 넘는 토스트를 두고 그렇게 맛있는 토스트는 처음이었다고 종종 말하고는 했다.


  지은은 코코넛 토스트와 라테를 먹으며 야외 카페의 분위기에 한껏 취해있던 엄마의 들뜬 소녀 같은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안개가 짙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안개가 아니었다면 넓게 펼쳐진 차밭과 멀리 보이는 101빌딩 따위에 정신이 팔려 엄마의 그 신이 난 얼굴을 그렇게 오래도록 눈에 새기지 못했을 것이다. 커피 봉고차의 노란 조명을 담은 엄마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미처 몰랐던 엄마의 새로운 표정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세상과 떨어진 구름 속 비밀의 카페 같은 기분을 선사해줘서 감사한 안개였다.


  엄마와의 여행은 가끔 주객이 전도되고는 한다. 엄마와 추억을 만들고, 즐기기 위해 떠난 여행이 더 맛있고 더 좋아할 곳을 찾아 모셔가야 한다는 부담을 주고, 그게 뭐라고 미안해하며 괜찮아 좋아 만을 남발하는 엄마가 어딘지 마음 아파서다. 그렇게 마냥 신났으면 하는 여행이 종종 너무 애틋해져서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기 시작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와의 여행은 죄책감과 애틋함의 무한 굴레 속에서 흘러간다. 두 손으로 토스트를 집어 들고 아이처럼 신이 났다가 또 생각에 잠긴 얼굴로 멀리 안갯속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지은은 어쩐지 자꾸 목이 메었다. 여행 내내 배경은 무시한 채 자신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찍어줬던 엄마와 투닥거리던 일이 떠올랐다. 이국적인 풍경보다 그 안에서 신난 딸의 얼굴이 더 값진 풍경이었을 엄마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커피 봉고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오래된 팝송과 서정적인 중국어 노래가 번갈아가며 흘러나왔다. 엄마는 가사도 모르는  노래들을 낮은 소리로 아무렇게나 따라 흥얼거렸고 커피숍에서 해가  지도록 머무르다 다시  갈색선을 타고 타이베이 도심으로 돌아왔. 마오콩셴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는 것이 일정의 전부였던 하루였지만 엄마는 자주 그날을 이야기한다. 오늘처럼 지은이 갈색선 전철을 타고 있다고 말하면 엄마는 그때마다 분명 ‘ 그때 마오콩 갔을  탔던 ?’라고 묻는 것이다.


  지은은 이제 갈색선의 반대쪽 끝인 송산공항 근처에서 작은 카페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나무가 무성해서 이곳 역시 엄마가 좋아하는 동네다. 사온 꽃으로 테이블을 꾸며 놓고 오픈 준비를 마치며 지은은 자신을 위한 라테를 한 잔 만들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세팅해둔 플레이리스트는 잔잔한 연주곡이나 중국어 노래가 대부분이다. 잔잔하게 막문위의  ‘不散,不見’이 흘러나왔다. 막문위가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라고 했다. 낮게 읊조리듯이 부르는 막문위의 창법도 충분히 감성적이지만 가사를 곱씹고 있자면 엄마가 떠오른다.


你是我世界起點(당신은 내 세상의 시작점이에요),

我是你荊棘冠冕(나는 당신에게 가시나무 면류관이죠),

把愛與虧欠揉成一圈(사랑과 미안함을 엮어 만든).


자식은 엄마에게 면류관처럼 영광이자 자랑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 숱한 아픔과 시련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시나무로 만든 면류관과 같다. 사랑과 미안함으로 엮어 만든 가시나무 면류관.

  

  노래를 들으며 잠시 멍해져 있는데 카페의 청록색 나무 문에 매달아 놓은 종이 경쾌하게 울리며 근처 조그만 디자인 회사 사람이 카페를 방문했다. 평소에도 가끔 커피를 사 가던 손님인데 며칠 전에는 양파수프 냄새를 맡고 들어와서 사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신메뉴로 뭘 만들어볼까 하고 그냥 시도 중이었던 스프라 그냥 가져가셔서 맛보시라고 드렸었다.


“주말인데 출근하세요?”

“아니요 오늘은 여자 친구랑 왔어요. 이 카페 좋아할 것 같아서.”


뒤이어 여자 친구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양파수프 잘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엄마가, 아 저는 말레이시아에서 왔는데 엄마가 자주 해줬었거든요. 양파수프….”


밀크티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오늘의 디저트를 추가하면서 그녀는 엄마의 양파수프에 대해서 몇 마디 더 덧붙였다.

엄마가 채식주의자라 고기 먹기 힘들다는 말과 함께, 베이컨이 들어간 양파 스프라 반가웠다고도 말했다.

이미 여러 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참 좋아한다고 지은은 생각했다.

어쨌거나 자신이 만든 음식이 엄마의 음식 같은 위안을 줬다니 기쁜 일이다. 잎 홍차를 진하게 우리고 에스프레소를 내리면서 지은은 오늘 저녁에는 엄마에게 전화해해 줄 이야기가 많겠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작가의 이전글 이방인의 아지트 - 타이베이 AGCT apartment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