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이 늘고 성장을 한 것인지, 창의성이 바닥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면 다른 디자이너들과 교류할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한 페친 분이 리드하는 사이드프로젝트에 지원했고 오늘 첫 아이데이션 모임을 가지게 됐다.
모임 자리에서 처음 공개된 프로젝트 내용은, 꽤 큰 단체가 외주를 맡겨온 디자인 전시 기획 프로젝트였다. 들어보니 아직 주제, 포맷, 참여대상 등등 정해진 것이 거의 없는 초기 기획 단계였고, 예산과 마감도 얼추 잡혀 있어서 다소 타이트한 스케쥴이 될 것 같았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난 뒤 곧바로 한명씩 돌아가며 기획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아이디어도 재밌지 않을까요?"
"이런 것도 좀 멋있을 것 같은데."
"저번에 이런걸 봤는데 되게 흥미롭더라고요!"
그렇게 다른 디자이너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EO에서 일하게된 뒤로 기획에 관한 내 사고방식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너는 정제된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메세지를 전달하는 직업이고, 메세지를 이미지로 추상화할땐 필연적으로 주관을 담을 수 밖에 없다. 또 일반 대중보다 비주얼 감각이 좋기 때문에 앞장서서 높은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역할을 가진다. 그래서 기획에 있어서도, 작가적 관점에서 아이디어를 탐색하고 탑다운의 관점으로 창의성을 설득하는데 익숙해져있다. 디자이너가 CEO인 배달의민족의 브랜딩만 봐도 그런 뉘앙스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처음 EO에서 일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팀의 디자이너로서 기준을 제시할 상황이 오면 나도 종종 창의성 기반의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또 그만큼 팀원들의 반대에 부딛히곤 한다. 그도 그럴것이 창의성 기반의 아이디어는 확장성과 잠재력을 갖지만 결국 그게 의도한 성과를 가져올지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올린 영상이 매번 대박을 치지는 못하는 것처럼, 디자인도 출시 전에는 대중의 피드백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한방의 성공에 많은 걸 걸기보다는, 실패 리스크를 최소화해 안정적인 루틴을 운영하는 쪽이 성과를 내기 쉽다.
사실 대부분의 비지니스에 해당되는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그래서 기획을 할 때도 담당자의 창의성을 뿜뿜해 새로움을 보여주기보다는, 판을 짜고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검증된 리소스들의 스케일업에 힘을 쏟으면 노력 대비 괜찮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컨텐츠 완성도만으로 단판 승부하려고 한다면 일단 퀄리티가 엄청 뛰어나야하고 또 운까지 따라야하니까.
"그런 이미지는 이런 마켓에 어필해야 시너지가 생길 것 같은데요?"
"임팩트를 더 끌고오면 이런 분들까지 참여하시게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소스가 한정돼있으니 미디어 단까지 기획하기엔 어렵지 않을까요?"
문득 나도 모르게 모임의 눈엣가시가 된게 아닌가 싶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냥 재밌고 즐겁게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려고 온 분들도 있었고, 게다가 EO에서는 줄곧 내가 그런 역할이었는데.. 즉흥에서 탄생한 훌륭한 디자인들도 사실 많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외주 프로젝트인데 진짜 그렇게 해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비지니스 인사이트가 늘고 시야가 넓어진 건지, 아니면 단지 재미없는 직장인이 돼버린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낯설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