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IR I.1] 4차 산업혁명 크게보기-1
2016년 1월에 개최됐던 다보스 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4IR)'이 본격 거론된 지 2년 반이 지났다. 그 동안 우리나라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열심히(?) 4IR에 대해 탐구해 왔고 상당 수의 정부 정책 문서, 공공/민간 연구기관의 보고서, 언론 보도자료와 기고, 전문가들의 저서 등이 쏟아져 나왔다. 학술단체를 포함한 다양한 정부/민간 단체/기관의 행사에서도 4IR은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과연 4IR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 대응해 온 것일까? 우리나라 정부/공공과 민간 부문에서는 과연 의미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이는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일 텐데.. 문제에 대한 이해 또는 정의가 잘못되었다면, 유효한 해법과 답안이 만들어 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4IR의 실체가 있다, 없다' 식의 논란이 있지만, 4IR, 바꿔 말하자면, 신기술 발전에 따라 등장하고 있는 기술, 산업/경제, 사회, 나아가 국가나 인류 차원의 거대한 변혁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적합한지, 또 1~3차 혁명에 이은 4차 혁명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3차 산업혁명'(2011)을 저술한 제러미 리프킨은 "지금의 변혁을 4차 산업혁명으로 지칭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한다. 엄청난 '변혁'이 시작되었고 그 크기가 일찌기 우리가 경험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정부, 기업, 개인 등 이해관계자들이, 각자 또 함께,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서 대응할 것인지를 찾아 정하고 실행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변혁의 정체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파악하고 이해관계자들이 공감, 합의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4IR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국내에서 여러 가지 이견들이 존재하는 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우화처럼 여러 이해관계자가 4IR을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면 공동의 목표 설정은 물론,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노력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4IR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정의로는 마땅히 2016년과 2017년에 발표된 2개 정부문서 안에 있는 정의를 꼽아야 할 것이다. 2016년 12월에 발표된 '지능정보사회 중장기 종합대책'은 4IR을 '인공지능(AI)과 ICBM(즉,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5G통신)을 결합한 지능정보기술로 경제, 사회, 삶 모두가 혁신적으로 변화하는 지능정보사회의 도래'로, 2017년 11월 30일, 정부의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통해 발표된 '(혁신 성장을 위한 사람 중심의) '4차 산업혁명 대응계획'은 4IR을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디지털 기술로 촉발되는 초연결 기반의 지능화 혁명- 산업뿐만 아니라 국가시스템, 사회, 삶 전반의 혁신적 변화'로 규정하였다. 그 외 국내 문헌들은 4IR을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생물학, 물리학 등의 경계가 없어지고 융합되는 기술혁명'(현대경제연구원, 2016),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낸 혁명으로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로봇공학, 사물인터넷, 무인운송수단, 3차원인쇄, 나노기술과 같은 6대 분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기술혁신'(위키백과) 등으로 정의하였다.
한편, 일반국민들은 4IR을 어떻게 이해, 인식하고 있을까? 2017년 4월 엠브레인의 조사에 의하면 4IR이라는 용어를 알면서 그 개념까지 이해하고 있는 국민은 24% 정도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4IR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2016년 12월 중소기업중앙회가 300여개의 제조 중소기업 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50% 이상이 4IR이 뭔지 전혀 모르고 있고, 11% 정도만 내용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국민들이 4IR을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많은 전문가들은 4IR을 '초연결, 초지능, 초융합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외국 정부나 선도기업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분들 중에는 정부 문서나 국내 번역서, 또 다른 전문가 등을 통해 4IR을 이해함에 따라 부정확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식견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4IR과 스마트 제조(예: 독일의 Industrie 4.0),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융합 등은 공통분모는 있지만, 특성이 다른데 이들을 혼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어떤 준비와 대응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학문이나 종사하고 있는 산업을 중심에 둔 단편적 처방들만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4IR에 대한 국내 이해관계자들의 기대나 이해는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년 여 동안 정치권은 4IR에 '새로운 정치 및 국가 건설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담아 왔고, 경제계는 '주력산업의 경쟁력 저하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탐색하고 있으며, 일반국민들은 '(희망적일지 절망적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내 자신, 가족, 일터 등의) 5~10년 후 미래'를 걱정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필자는 4IR을 '3차 산업혁명의 기반 위에서 다양한 기술융합의 결과로물질세계, 디지털세계, 생명세계 사이의 경계가 낮아지는 사회 전반의 변혁'으로 정의한다. 이는 2016년 1월, 세계경제포럼(WEF) 의장인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 포럼에서 행한 연설을 내 나름대로 번역한 것이다. 슈밥은 4IR을 아래와 같이 규정하였다.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is building on the Third, the digital revolution that has been occurring since the middle of the last century. It is characterized by a fusion of technologies that is blurring the lines between the physical, digital, and biological spheres.'
슈밥의 정의를 충실히 따른다면, 국내에서는 4IR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만연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첫째, 4IR은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되어 온 디지털 혁명(또는 정보혁명)의 기반 위에서 일어나는 혁명인 것이지 단순히 정보혁명이 연장된 개념은 아니다. 따라서, 4IR을 AI와 ICBM 등 최근에 부각된 디지털 플랫폼 기술에 가두고 있는 것은 지극히 편협한 문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통신(망)기술을 제외하면 AI와 ICBM, 그 핵심인 소프트웨어(SW)의 국내 기술/산업 수준은 선도 국가/기업에 비해 크게 뒤지고 있는 상황이니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이길 승산이 없는 무기를 빼들고 있는 형국이다.
둘째, 4IR은 디지털 기술을 포함한 신기술이 핵심 동인(driver)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산업경제, 나아가 사회, 국가, 인류 차원의 변혁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기술 중심의 시각, 기술자 주도의 접근에 머물러 있다. 2018년 1월에 출간된 저서를 통해 슈밥도 강조하고 있지만, 4IR은 기술이 사회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기술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기술-경제-사회가 상호작용을 통해 유토피아 또는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술이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면밀히 따져야 하고, 역으로 경제나 사회가 기술 발전을 촉진 또는 억제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4IR에 대한 정책/전략 수립 과정에 공학/자연과학자 외에도 사회과학, 인문학, 문화예술 전문가, 나아가 일반국민도 참여해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4IR을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 기술의 융합'으로 번역한 것은 엄청난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필자는 물리학이 아닌 물질계 기술, 생물학이 아닌 생명계 기술로 번역하였다. 물리학, 생물학은 경계가 있는 학문/지식이지만, 물질계 기술(예: 무인운송수단, 3D 프린팅), 생명계 기술(예: 유전자 편집, 합성생물학), 디지털 기술(예: 블록체인, 온디맨드 경제)은 독립된 기술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지식/기술이 문제해결을 위해 결합된 융합기술(converging technology)인 것이다.
융합(convergence)은 '두 가지 이상을 섞는 것' 이상의 정책/전략적 함의를 가진 용어이다. 2013년, 미국 과학재단(NSF)이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융합은 이질적 지식의 연결과 통합을 통해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산해 가는 진화적 수렴-발산(convergence-divergence) 프로세스'이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은 다양한 지식/기술, 재료/부품, SW 등을 결합한 혁신적 제품인데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그 위에 수많은 앱이 탑재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신산업을 만들어 냈다. 2002년에 미국이, 2004년에 EU가 정부 주도로 시작한 융합은 나노-바이오-정보기술과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을 중심으로 한 'NBIC 기술융합'이었다. 그 성과를 혁신적 기업들이 넘겨 받아서 제품/서비스 융합(예: 스마트폰), 산업융합(예: 스마트시티)으로 발전시켰고, 이제 사회/인류 문제 해결을 위한 융합(즉, 사회융합)으로 발전하고 있다. 융합 관점에서 보면, 4IR은 3가지 영역의 기술융합이 만들어 내는 경제, 사회 측면의 변화를 가리킨다 (아래 그림 참조).
그림에서 A는 물질계와 가상계의 융합 (예: O2O, 증강현실), B는 물질계와 생명계의 융합 (예: 인조인간, 나노바이오소재), C는 생명계와 가상계의 융합 (예: 유전자분석, 바이오컴퓨터)을 가리킨다. 세 영역이 교차하는 곳은 NBIC 융합 (예: 미국의 재생의학 과제, EU의 비만치료 과제)의 대상인 셈이다. 2011년, 독일 인공지능연구소(DFKI)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기술로 가상물리시스템(CPS: Cyber Physical System)을 꼽았는데 이것은 가상계와 물질계의 융합 결과를 가리킨다. CPS는 향후, 인간과 동/식물 등 생명계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