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경제-13
플랫폼 정부의 개념과 구현 원칙
플랫폼 정부(GaaP: Government as a Platform)는 O’Reilly Media의 창립자로 오픈소스, 웹 2.0 등을 전파한 Tim O’Reilly가 2010년에 발표한 글에 등장한 용어이다. GaaP는 클라우드 서비스가 확산하면서 등장한 ‘X(everything) as a Service’ 즉, ‘무엇이든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을 형성하면서 각종 IT 자산을 구매해서 사용하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빌려 쓰는 방식이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GaaP는 제품을 미리 만들어 놓고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자판기 같은 정부가 아니라 사용자인 국민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그때그때 알맞은 서비스로 만들어서 제공하는 정부를 가리킨다. O’Reilly는 단방향의 폐쇄적 플랫폼이던 ‘웹 1.0’이 개방/참여/공유를 지향하는 ‘웹 2.0’으로 발전한 것처럼, 미리 만들어 둔 서비스를 국민이 호/불호에 상관없이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식의 ‘정부 1.0’은 여러 이해관계자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하는 ‘정부 2.0’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O’Reilly는 GaaP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려면 웹이나 아이폰 등 컴퓨터 플랫폼이 성공한 사례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인터넷, 아이폰처럼) 개방형 표준을 통해 상호운용성을 보장함으로써 혁신과 성장을 촉발하고, 단순한 시스템을 먼저 구축한 다음 이를 점차 발전시키며(즉, 진화적 개발), (리눅스처럼) 다수 개발자가 참여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고, 내부에서 개발한 초기 시스템을 외부의 '해커'가 개선-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며(즉, 내/외부 연결/협업), 사용자의 데이터 기반 피드백을 공동창조에 활용하고(즉, 집단지성 활용), 반복적 실험을 통해 성공에 이르는 방식(즉, 애자일 방식)을 적용하며, 기존 시스템의 개선보다는 유용한 새로운 시스템을 실제 사례로 보여주라는(즉, Learn by Example) 것 등이다. 한 가지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 ‘플랫폼’은 디지털 시스템의 한 계층인 디지털 플랫폼뿐만 아니라 PC,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인프라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인프라 위에서 구성요소 간 중복을 배제하고 상호운용성을 보장하기 위한 핵심 기술요소이다.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은 서로 다른 기술로 구현된 모듈들이 원활한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에스토니아와 싱가포르의 성공요인
ONI & BCG(2020)는 개방적 디지털환경(ODE: Open Digital Environment) 연구의 일환으로 에스토니아와 싱가포르 사례를 분석한 바 있다. 에스토니아 디지털 정부의 우수한 점으로는 X-Road가 견지해 온 개발/관리 원칙 즉, 첫째 공공과 민간의 여러 시스템을 연결, 통합할 수 있는 개방적이며 상호운용 가능한 구조, 둘째 재사용 및 공유 가능한 컴포넌트 활용, 셋째 데이터 교환 과정에서 프라이버시와 기밀 유지 보장, 넷째 애자일(agile) 개발방법론 적용, 다섯째 다수의 공공/민간 조직 참여를 통한 공동창조(co-creation), 여섯째 혁신가들의 협업 네트워크 육성 등을 꼽았다. 실제 X-Road 플랫폼은 e-에스토니아가 분산성, 상호운용성, 무결성, 투명성을 보장하는 기술 기반이 되고 있다. 논리적 연결, 통합을 쉽고 안전하게 구현할 수 있기에 굳이 공유 가능한 타 부처/기관의 데이터/서비스를 중복해서 개발하거나 보유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최소 데이터 원칙(Once-only principle)’을 법률로 규정해서 국민이 데이터를 이중으로 입력하거나 정부가 중복해서 보유하지 않도록 하며, 데이터에 대한 모든 접근기록을 투명하게 관리한 것도 탁월한 점이다. 그와 같은 기술/제도를 기반으로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이나 개인도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 참여하게 되어 디지털 정부 구현에 필요한 인력/예산, 기간 등을 줄일 수 있었다.
싱가포르가 2014년에 수립한 ‘스마트 국가’는 디지털화 범위를 정부를 넘어서 국가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더 큰 문제를, 더 크고 넓은 시각에서 해결하면서 인력/예산, 시간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기술 측면에서는 싱가포르도 공유 가능한 빌딩 블록을 ‘기술 스택’에 포함하고 이를 정부와 민간이 함께 표준으로 제정, 관리함으로써 상호운용성을 높인 것이 성공요인이다.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스마트 국가라는 큰 문제를 특정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에 산재해 있는 기능과 전문성을 하나로 모은 일종의 cross-functional 조직을 통해 일관성 있는 정책을 수립, 추진한 것이 성공요인이다.
두 나라 모두 개방적이고 투명한 정책 운영을 통해 기업과 국민 참여를 높인 것이 또 다른 공통점이다. 두 나라는 우리나라나 미국, 영국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국가이기에 관련 정부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 용이했을 것이다. 국가 규모가 크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로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과업이겠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비효율과 낭비는 피할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기술 측면에서는 물리적 집적이 아니라 논리적 연결/통합을 이룩하고 관리체제는 물리적 집적을 넘어서 진정한 ‘원팀’을 이룰 수 있는 리더십과 절차를 마련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 수준과 문제점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행정전산망을 구축하고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정부 구현을 목표로 서비스 범위를 확대하면서 수준을 고도화해 왔다. 그 결과, 2022년 UN의 전자정부 평가에서 193개 회원국 중 덴마크와 핀란드에 이어 3위가 됨에 따라 2010년 이래 7회 연속 3위 이내에 기록된 국가가 되었다. 2022년에 처음으로 실시된 OECD 디지털 정부 평가에서는 33개국 중 종합 1위를, 2023년 OECD 공공데이터 평가 결과에서는 40개국 중 1위를 차지하였다. 실제 많은 국민이 국세청의 ‘홈택스’나 ‘정부24’, ‘고용24’ 등의 포탈을 통해 생활과 직결된 정부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제도 및 기술 측면의 도전과제를 갖고 있다. 부처별로 구축한 약 17,000개 시스템이 (상호연결이 어려운) 사일로(silo)이며, 데이터 개방/공유 실현에 이르는 장벽이 높고, 기술은 디지털이지만 절차는 아날로그이며, 많은 정부/공공 시스템이 클라우드가 아닌 시스템통합(SI) 방식으로 구축된 것이 걸림돌인 것이다(정부만, 2023). 주문형/맞춤형 개발을 의미하는 SI 방식은, 클라우드 방식과 달리, 모듈화/표준화를 통한 연결, 통합이 어려운 모노리식(monolithic)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가 한편에서는 세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정부는 2022년 1월, 디지털플랫폼정부 구상을 발표하고 2025년까지 성숙 단계에 집입할 것을 목표로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플랫폼정부’(이하 ‘디플정’)는 ‘모든 데이터가 융합되는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국민·기업·정부가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에게 더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국민과 기업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정부’를 가리킨다(디플정위, 2023). 국민을 포함한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공동창조를 지속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디지털 (플랫폼) 정부를 넘어서 디지털 경제, 디지털 사회를 아우르는 디지털 국가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디플정은 개념적으로는 종래의 전자정부 내지 디지털 정부를 GaaP로 확장함으로써 국민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큰 가치를 창조하는 정부인 것이다. 디플정은 ‘인공지능(AI) 데이터로 만드는 세계 최고의 플랫폼 정부’라는 비전/목표 달성을 위해 국민 중심, 하나의 정부, AI/데이터 기반, 민관 협력 등 4가지 기본원칙과 애자일 개발·운영·개선과 민관협업 조직, 사용자 중심 서비스, 공개·연계·개방, 안전/신뢰성 제공 등 5가지 업무원칙을 설정하고 있다. 2023년 4월에 공표된 ‘디플정 실현계획’은 오직 국민을 위한 정부, 똑똑한 원팀 정부, 민관이 함께하는 성장 플랫폼, 믿고 안심할 수 있는 플랫폼 정부라는 4대 전략과 ‘2023년 국민 체감으로 추진동력 확보, 2024년 기반구축으로 실행력 제고, 2025년 전면화로 성숙단계 진입’이라는 연도별 목표하에 총 122개 과제가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선결 과제
지난 글에서 필자는 주요 국가를 플랫폼에 대한 ‘규제 우선’ 국가와 ‘촉진 우선’ 국가로 나누고 인구/시장/경제 규모나 역량 면에서 중간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는 에스토니아나 싱가포르 같은 ‘촉진 우선’ 국가의 접근방식을 더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소견을 제시하였다. 디플정을 ‘디지털 국가’ 전략으로 업그레이드 함으로써 플랫폼 생태계와 관련한 당면 딜레마도 해소(또는 완화)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디지털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디지털 정부는 디지털 경제, 디지털 사회 등과 함께 ‘디지털 국가’를 구성하는 하부 시스템 중 하나이므로 기존 계획을 일부는 새롭게, 또 일부는 수정/보완해서 더 큰 비전과 목표, 전략과 실행방법 등을 담은 전략으로 재정립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디지털 정부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에스토니아, 싱가포르는 물론, 미국, 영국 등에 못지않게 우수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UN, IMD, OECD 등의 평가 기준으로는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국가라는 더 큰 목표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가 안고 있는 기술/관리 측면의 약점이 계속해서 크나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어떤 분야를 대상으로 한 것이든 상관없이 특정 디지털 시스템의 효율(예: 시간/비용)과 효과(예: 상호운용성)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플랫폼 계층의 기능/성능이다. 공통구성품인 플랫폼을 통해 리거시 시스템을 통합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존 서비스를 연결하거나 새로운 서비스를 확장하는 것은 비효율과 불안정을 키우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관리 측면에서는 정부/공공과 민간 부문이 가진 기술/경험, 인력/예산 등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집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먼저 구축되어야 한다. 해결해야 문제의 범위와 깊이가 훨씬 더 크기에 정부가 가진 자산만으로는 곧 한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정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술 측면에서는 잘 정의된 플랫폼(예: X-Road, 디플정의 ‘DPG 허브’)을 우선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시스템을 점차 재구성하는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거버넌스 측면에서는 보다 강력한 리더십과 제도로 부처별, 기관별로 각개약진하는 식의 사업/시스템을 조정, 통제함으로써 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셋째, 민간 기업과 국민이 사용자로서뿐만 아니라 개발자로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기술적, 제도적 환경(예: 협업 네트워크와 플랫폼, 인센티브 등)을 마련해야 한다. 넷째, 단기 성과와 장기 목표에 대한 알맞은 조화가 필요하다. ‘추진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단기 성과를 내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바늘허리 꿰는 식’이 된다면 비용/시간을 낭비하게 되어 오히려 ‘동력’을 잃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2023), 디지털플랫폼정부 실현계획, 2023. 4. 14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2023), 세상을 바꾸는 디지털플랫폼정부, 2023. 11. 23.
∙정부만(2023), “디지털플랫폼정부 패러다임 혁신과 서비스”, 서비스강국코리아 컨퍼런스 발표자료집, 2023. 12. 14.
∙ONI & BCG(2020), ‘Estonia X-Road: Open Digital Ecosystem Case Study’.
∙ONI & BCG(2020), ‘Singapore Smart Nation & Digital Government: Open Digital Ecosystem Case Study’.
∙O'Reilly, Tom(2010), ‘Government as a Platform’, Innovations, 6(1), O'Reilly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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