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규정한 것처럼 디지털 혁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디지털 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이나 AI 전환에 비하면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에 긴 호흡으로 준비, 대응해야 하는 (기업)혁신의 일종이다. 기업혁신은 기업활동 전반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거나 개선하는 과정이면서 결과물이다. 이론적으로는 기업이 보유한 모든 자산(asset)과 역량(skill)이 가치를 창출하거나 개선할 대상(: what to innovate)이다. 가치 창출/개선 수단(: how to innovate)은 전통적으로 여러 분야의 지식/학문에서 비롯된 기술을 활용해 왔다. 혁신은 오랫동안 자연과학/공학에 기반한 제품혁신과 공정혁신 같은 ‘기술혁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다가 2000년대 초에야 조직혁신, 마케팅혁신 같은 ‘비(非)기술혁신’을 포함하는 용어가 되었다.
ICT는 1970년대 이후 기업활동을 돕는 수단(‘enabler’)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지만, 1990년대 인터넷/웹 기술, 2000년대 모바일/스마트 기술, 2010년대 AI를 포함한 신기술을 아우르는 디지털 기술로 발전하면서 가치창출 주도자(‘transformer’)가 되었다. 과거 ICT 혁신은 비기술혁신으로 분류되었으나 이제 디지털 혁신은 무엇보다 더 중요한 기술혁신 전략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기술 발전 못지않게 소비자 기대/욕구가 커졌고 기업 내/외부 도전과제의 복잡성도 커졌기에 사람과 조직의 가치를 높이는 비기술혁신이 병행되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디지털 혁신은 상위 개념인 기업혁신 차원에서 기술과 비기술을 모두 혁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형성된 ‘사람’의 지식/기량, 사고방식, 작업방식, 그리고 ‘조직’의 구조, 제도, 문화 등의 디지털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표-1>은 주요 테크 기업이 정의하고 있는 디지털 혁신을 목적과 수단(접근방법)으로 나눈 것이다. 한 마디로, 디지털 혁신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제품, 공정, 업무방식, 직원/고객/파트너, 비즈니스 모델(BM) 등 물적/지적/인적 요소를 재개발하고 이들 간의 관계 또는 상호작용을 재정립해서 성장을 이룩하려는 기업혁신 전략이다. DX 개념을 초기에 정립한 MIT & Capgemini(2011)는 ‘성공적 DX는 신기술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기술이 제공하는 가능성을 활용하도록 조직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DX는 기술 전략이 아니라 기업혁신 전략인 것이다.
<표-1> 주요 기술 기업의 디지털 혁신 정의 (출처: 각 사 홈페이지)
디지털 혁신 발전과정
디지털 혁신은 컴퓨터가 기업활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등장한 1960년대 말에 시작되어 점차 범위가 확대되고 수준은 고도화되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혁신의 발전과정을 디지타이제이션, 디지털라이제이션, 디지털 전환 등 3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디지타이제이션(digitization)은 1960년대 말 이후 텍스트나 그림 같은 아날로그 데이터와 처리방식을 디지털화하는 것을, 디지털라이제이션(digitalization)은 1980년대 말 이후 제품/서비스나 공정, 업무방식 등을 디지털화(예: 전자책, 인터넷 쇼핑/뱅킹) 하는 것을 가리킨다. 디지타이제이션이 디지털 혁신 역량(competency)을 갖추는 단계라면, 디지털라이제이션은 확보한 역량을 활용(usage)하는 단계이고, DX는 디지털 문해력(literacy)을 구사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표-2> 참조).
<표-2> 디지털 혁신의 발전과정 (3단계)
디지털 혁신이 본격화된 디지털라이제이션 단계의 몇 가지 기업혁신 전략을 통해 DX 단계는 어떤 점이 달라진 것인지 살펴보자. 소개할 2개의 전략 중 하나는 미국 국방부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 추진했던 기업통합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조지아텍의 탄넨바움연구소가 2000년대 중반에 제안한 기업변환 전략이다. 기업통합(Enterprise Integration)은 stovepipe(연통)처럼 횡적 연결이 안 되는 局地的(local) 사고(思考)와 업무방식을 全社(enterprise) 차원의 그것으로 바꾸려는 전략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기술’의 표준화/현대화를 통해 ‘데이터’를 쉽게 교환/공유해서 분산 & 분절된 ‘업무기능(function)’을 연결하고 각종 ‘사업(program)’을 통합하는 데 있었다. 기술 측면에서는 종래의 다양한 표준을 인터넷/웹 표준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관리 측면에서는 직원과 파트너 등의 공감과 열정을 끌어내서 행태, 가치관, 태도를 바꾸고 고객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을 중시하였다. 기업변환(Enterprise Transformation)은 2000년대 초, 기업 외부의 정치/경제/사회 변화와 급속히 발전한 디지털 기술을 감안, 전략 차원에서는 목표시장, 유통채널, 제품/서비스 등을 재정립하고 실무 차원에서는 공급망 재구축, 온라인화 등을 추진하는 전략이다. 디지털 기술이 내부 운영 효율화를 넘어 외부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전략적 도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두 전략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온고이지신’ https://brunch.co.kr/@duk-hyun/18을 참조 바람).
DX는 2010년대 초에 ①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모바일/5G, 증강현실(AR)/가상현실(VR)/메타버스, 3D 프린팅, 블록체인, 로봇/드론 등 디지털 신기술이 성숙 단계에 이르면서 ② 혁신적 BM으로 무장한 플랫폼 기업, 공유 서비스 기업 등이 등장하고 ③ 전통기업이 디지털 ‘전환’에 집중 투자함에 따라 본격화된 것이다. 에어비앤비(2008~)와 우버(2009~)는 숙박시설이나 차량을 소유하지 않고도 각각 숙박업, 운수업의 기존 강자를 넘어서는 성과를 이룩했다. GE, 버버리 등 오랫동안 탁월한 제품/서비스로 시장지배력을 유지해 온 전통산업의 강자들도 그와 같은 신흥 기업의 BM을 벤치마킹하게 되었다. DX는 스타트업에게는 기존 질서와 시장을 파괴(disruption)할 것을 목표로 한 급진적 ‘혁명(revolution)’이고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기존 기업에게는 점진적 ‘진화(evolution)’ 과정이다.
디지털 혁신, 기술 요소 (What to do)
디지털 혁신은 기술 측면에서는 ‘X’ + 디지털 기술 즉, 기업활동을 구성하는 ‘X’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서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디지털화 대상 ‘X’는 기업활동에 투입되는 물적/지적/인적/금전적 자산(asset)과 구성원의 기량(skill)을 포함한다. 물적 자산은 제품/부품, 소재/자재, 장비, 설비 등을, 지적 자산은 데이터/정보/지식, SW, 서비스, 기술 등을, 인적 자산은 정규/비정규 직원과 외부 파트너를 포함한다. 기량은 구성원이 가진 지식을 무언가에 적용/활용하는 능력으로 표현력, 의사소통 능력, 관리 능력, 문제해결 능력, 기계 조작 능력, 시스템 개발 능력 등을 가리킨다. 디지털화 수단인 기술은 디지털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으로 1990년대에 등장한 인터넷/웹 기술, 2000년대의 유비쿼터스(ubiquitous) 또는 모바일/스마트 기술, 2010년대에 부상한 여러 가지 신기술 등이 포함된다. 디지털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디지털화 대상인 ‘X’의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의 육체적 활동이 디지털화 대상이었지만, 이제 창작, 컨설팅, 법률 적용 판단, 경영 의사결정 등 전문가들의 지적 활동까지 디지털화 대상이 되고 있다.
디지털화 대상과 수단을 선택, 조합하는 것은 전략적 & 전술적 의사결정 문제이다. 전략적 의사결정은 경쟁우위 확보(예: 신제품이나 신개념 서비스 개발), 전술적 의사결정은 운영 효율성(예: 시간 단축, 비용 절감)이나 고객경험 개선(예: 신속 배송)에 초점을 둔 것이다. 어떤 의사결정이든 기본적으로 기술적/경제적/운용적 타당성 검토가 전제되어야 한다. 기술적 타당성은 필요한 기술을 필요한 시기에 도입(또는 개발)할 수 있는지, 경제적 타당성은 비용 대 효과가 만족할 만한 수준인지, 운용적(operational)타당성은 디지털화 결과물을 소비자/이용자가 수용-활용할 것인지 여부를 따지는 과정이다. 신기술은 도입 여부를 결정하기보다는 위와 같은 타당성을 충족할 시기를 판단하고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방법으로 도입, 적용, 교체할 계획을 수립해 두는 것이 필요하다. ‘쓸만한 기술’은 언제든 존재하지만, 그 목록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고 얻게 될 가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기’ 문제는 first mover가 될 것인지 아니면 fast follower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각각 장/단점이 있다. ‘방법’은 크게 자체개발(make) 또는 외부도입(buy)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또한 장/단점이 있다.
디지털 혁신, 관리 요소 (Why to do & How to do)
디지털 기술이 성숙함에 따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엄청나게 커졌지만, 디지털 혁신의 성공 여부는 기술요소보다는 오히려 전략, 비즈니스 모델(BM), 거버넌스, 실행력 등 관리요소에 좌우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략 (수립)은 방향을 설정하는 것으로 외부 환경이 VUCA(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 모호성)로 가득할 때 더욱더 필수 작업이다. 디지털 혁신의 목표를 비용 절감에 둘 것인지 아니면 수익 증대/창출에 둘 것인지에 따라 성공 가능성이나 성과의 크기가 달라진다. 전략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BM을 꼽을 수 있다. BM은 기업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거나 기존 가치를 개선하기 위해 자원과 역량을 모으고 결합해서 제품/서비스를 생산-유통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가치를 확보한 플랫폼 기업은 대부분 탁월한 제품/서비스로 출발했지만, 기업 내/외부 역량을 연결하고 내부 임직원은 물론 외부 개발자나 소비자 참여를 통해 획기적 성과를 이룩한 것이다.
흔히 지배구조로 번역되는 ‘거버넌스(governance)’는 리더십, 조직구조, 의사결정 절차 등을 포함한다. CEO, CDO(Chief Digital Officer), CFO 등 경영진이 디지털 혁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략 수립으로부터 혁신 과제 선정과 실행을 관리했는지 여부가 성공을 좌우한다. ‘디지털 리더’는 지난 20~30여 년 동안 등장한 여러 가지 신기술의 특성과 변화의 맥락(context)을 이해하는 전문가이어야 한다. 다만, 과거의 성공이나 실패 경험/사례를 지금 똑같은 잣대로 재단(裁斷)하는 식의 접근은 배제되어야 한다. 디지털 혁신을 전사 차원에서 추진하기 위해서는 여러 기능부서의 전문가를 cross-functional team 또는 COE(Center of Excellence)로 구성,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행력’은 경영진으로부터 실무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것으로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와 위협 요인 이해, 문제해결에 필요한 기술의 선별과 알맞은 기술 선정, 디지털 시스템의 운영/활용 능력 등을 포함한다. 또한, ‘디지털 퍼스트’ 마인드, 지속적 학습과 실험 능력 등도 필수적이다. 디지털 혁신을 위해 조직 구조를 수평적/협업적으로, 조직 문화는 개방적으로 전환해 가는 것도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