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진심은 언제나 마지막 질문이 된다

설명보다 결과를 먼저 요구하는 순간

by 울림

루미에르의 회의실 문은

언제나 안쪽으로 열렸다.

문을 여는 쪽이

상대의 얼굴을 먼저 보게 되어 있었다.


그날
문 앞에 선 사람은

이지윤이 아니었다.


외부 클라이언트였다.

정원그룹

광고 업계에서는
이름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지는 회사였다.

명함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로고가 또렷했다.

정렬된 명함만큼이나
회의실의 분위기도 정렬돼 있었다.

누구도 먼저 말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먼저 웃지 않았다.


“이번 캠페인은
조금 더 공격적으로 가고 싶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첫마디는
늘 그렇듯
부드러웠다.

“요즘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냉정하잖아요.”

고개가 몇 번 끄덕여졌다.

“그래서 더더욱

명확해야 합니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리모컨을 눌렀다.

스크린에 문장이 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당신.

익숙한 문장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는 문장.

“이런 메시지는
아직도 반응이 좋아요.”

클라이언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결국 더 나은 쪽을 선택하니까요.”

이지윤은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더 나은 쪽.

그 말은
항상 지금을 부정하는 말처럼 들렸다.


강태하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 문장을 그대로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회의실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이동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클라이언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떤 질문이죠?”


“지금의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잠깐의 침묵.

그 침묵은 거절보다는
낯섦에 가까웠다.


“그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질문은
빠르고 정확했다.


이지윤은
그 질문이
광고 업계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지 알고 있었다.


설득이 되느냐.

먹히느냐.

성과가 나오느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부정당할 때보다
인정받을 때
더 오래 기억합니다.”

강태하의 말은
차분했지만
쉽게 흘려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늘
더 나은 미래만 보여줬죠.”

“그런데 그 사이에서
지금의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메모를 멈췄고,


누군가는
의자를 조금 고쳐 앉았다.


클라이언트가
천천히 물었다.


“그건
진심인가요, 전략인가요?”

그 질문이
회의실 공기를
조금 바꿨다.


이지윤은
숨을 삼켰다.


그 질문은
자신에게도
늘 따라붙던 질문이었다.


강태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답했다.

“둘 다입니다.”

“진심이 없으면
전략이 오래가지 못하고,
전략이 없으면
진심은 전달되지 않으니까요.”


클라이언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그럼
리스크는요?”


“있습니다.”


강태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도
리스크입니다.”


회의는그 지점에서
쉽게 끝나지 않았다.

숫자와 사례가 오갔고,
비교와 반박이 이어졌다.


이지윤은
그 모든 말을 들으며
노트에 문장을 적었다.


설득은
언제나 진심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회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완전히 설득된 얼굴도,
완전히 거부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

복도로 나오자
이지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윤새롬이
그녀 옆에 섰다.

“오늘 회의,
쉽지 않았죠.”

[이지윤]

“네.”

[윤새롬]

“대표님도
꽤 무리하신 것 같고요.”


이지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도
필요한 말이었어요.”


윤새롬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동의인지,
유보인지
이지윤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강태하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회의 자료를
다시 넘기다가
문장 하나에서
시선이 멈췄다.


지금보다 더 나은 당신.

그는
그 문장을
삭제하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에
다른 문장을 써 내려갔다.


지금의 당신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이지윤은

집에서 노트북을 켰다.

이번엔 메모장이 아니라
원고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조용히 적었다.

진심은 설득되기 전까지
항상 의심받는다.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아직은
불완전했지만,
그 불완전함이
지금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설득이 시작되는 순간,
관계는 아주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어긋남이 없다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닫고 있었다.


[다음 화 예고]

사람들은

왜 설명보다
결과를 먼저 믿을까.


진심이
숫자로 환산되는 순간,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