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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Jul 20. 2021

검은 머리의 영정사진

나에게는 두 분의 외할머니가 계셨다. 내가 아주 어릴 적에는 그중 키가 더 크신 분을 큰할머니, 작은 분을 작은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다 미취학 아동 시절이 끝나갈 즈음, 엄마는 나에게 앞으로 큰할머니를 작은할머니, 작은할머니를 큰할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때부터 내가 큰할머니라 불렀던 분은 증조 외할머니였다. 큰할머니는 1917년생이셨는데, 어리실 때는 시골에서 자라 자신의 나라가 조선이 아닌 일본인 줄 아셨다고 한다. 3.1운동이 큰할머니가 3살 때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나에게는 까마득한 과거 같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단 한 순간도 고아였던 적이 없었다.


큰할머니를 뵐 때마다 꼭 나에게 하시던 말이 있었는데, 씨익 웃으시며 ‘야는 누고, 야는 뉘 집 아들내미고’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늘 허허 웃었고, 주변에 있던 엄마나 이모들도 웃으며 다가와 ‘할머니, 00다이가’라고 하시곤 했다.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토요일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큰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큰할머니가 계시던 요양병원 방문도 안 되고, 한 달에 두어 번 하시던 외출도 못 하셔서 나는 1년 넘게 뵌 적도 없었다.


일요일에 부산에 내려갔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큰이모가 맞아주셨다. 나는 정장을 입고 갔는데, 큰할머니는 내가 정장 입은 모습을 처음 보셨을 거다. 절 두 번과 반절 한번. 고개를 드니 영정사진이 있었다. 나도 검은 머리의 큰할머니 모습을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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