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때론 굉장히 볼품없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나는 계단 사이 공간에 혼자 서있었다. 이제는 산 지 10년째가 된 데상트 저지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읽지도 않을 책들이 들려있었다. 유리로 되어 있던 벽에는 밤이라 그런지 거울처럼 내가 비치고 있었고, 그 너머로 반쯤 채워져 있던 달이 보였다.
이것이 데상트 저지가 내 라이너스의 담요가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양쪽 팔에 있던 로고는 떼어져 나간 지 오래고, 왼쪽 손목의 구멍은 엄마가 3번을 기워주었음에도 여전히 뚫려있다. 이제는 잘 입지도 않지만 가장 손 닿기 쉬운 곳에 걸려있는 옷을 보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 역시나 볼품없는 순간이다.
이전에 누군가에게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물었고, 그의 답은 ‘공란 혹은 500페이지짜리 논문’이었다. 논문의 문장들은 진한 연필로 꾹꾹 눌러져 쓰였을 것이다. 번지기도 했겠지. 여전히 나는 많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