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이야기 #1
나의 아버지는 내가 대학 4학년이었던 98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신지 이제 20년이 되어간다. 나이가 들고 나의 기억력이 나빠지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를 좀 더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아이들에게 너의 할아버지는 이런 분이셨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가장 기억 많이 남는 것은 CT100을 몰면서 배달일을 하시는 이미지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렸을 때부터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구형 CT100을 몰면서 배달일을 하셨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우유 배달일을 하셨고, 내가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즉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치킨 배달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남루한 차림의 작업복을 입고 배달일을 하셨기 때문에 난 자가용을 타면서 양복을 입고 회사를 다니는 아빠를 가진 다른 아이들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간혹 학교에 늦어서 아버지가 태워주신다고 하셔도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것이 부끄러워 거부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도 자동차를 사자고 몇 년을 졸랐지만, 결국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우리가 차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만큼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철부지 아들이었다.
우리 집은 지방 도시인 청주 시 외곽에서 치킨집을 했었다. 시 외곽이었기 때문에 간혹 한번 배달에 30분이 넘게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과 비가 오는 장마철에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힘든 내색 없이 배달일을 하시곤 하셨다. 영업이 끝나면 종종 아버지와 어머니는 치킨을 집으로 가져오곤 하셨다. 늦은 밤이었지만 우리 네 식구가 치킨을 먹었던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버지는 치킨을 먹으면서 우리와 이야기하고 싶으셨었던 것 같다. 고된 일로 인해 대화할 시간도 힘도 없으셨겠지만,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었던 것 같다.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이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지만, 나의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위해 헌신적이었던 기억은 나에게는 특별하다. 나에게 아버지는 고맙고도 미안한 존재이다. 나이가 들고 내가 아버지가 되어 내 아이들을 보면서 내 아버지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셨을까가 이해가 되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떠 올린다. 거울을 보고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기억하게 된다.
지금도 구형 CT100을 보거나 치킨 배달하시는 분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래서 구형 CT100은 나에게는 특별한 오토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