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좌파 논리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1960년대의 고무신과 막걸리는 낭만이라도 있었다. 1992년 3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대 내에서 조직적인 부정선거가 발생한다. ROTC 출신의 9사단 소대장 이지문 중위가 이를 폭로하자, 국방부는 소속 부대원들에게 그런 일이 없었다는 자필 확인서를 쓰도록 한 뒤,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이 중위를 이등병으로 강등 전역시킴으로써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시도했다. 이로 인해 입대 전에 취업했던 삼성으로부터 입사 취소 처분을 받는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지문 씨는 연세대학교에서 추첨 민주주의를 주제로 2011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는 것이다. 선거 대신 제비뽑기로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를 선출해도 현재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발상이 통쾌하다.
어느 나라 어느 국민도 자신에게 불리한 정당이나 후보들에게 표를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선거를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을 안 가리고 불법과 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젊은 직장인들의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보궐선거 날 출퇴근 시간 터널에서 공사로 교통을 정체시킨다든가, 상대 후보의 홈페이지에 디도스 공격으로 유권자의 접근을 막는 등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그 결정판은 5년 전에 드러난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이다. 사건의 발발과 전개과정을 보면 개콘이 시기 질투할 지경인 코미디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는 대선 3일 전인 2012년 12월 16일 밤 11시에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전문가 10명 투입한 결과 문재인 비방이나 박근혜 지지 댓글 못 찾았다며 혐의 없음을 보도한 것이다.
어처구니없다는 점에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1987년 발표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여론조사에서 이날 밤 크로스오버가 일어나면서 박근혜가 문재인을 앞섰다는 사후의 여론조사 발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조작이 유권자들에게 통한다는 것인데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까. 오늘 국정원 댓글녀 당사자인 김하영 씨가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는다는 기사를 보았다. 상부의 지시로 허위로 진술했다고 자백한 그녀는 위증죄로 최소 금고 이상의 형을 받고 해직이나 파면될 것이 틀림없다. 그녀가 만에 하나 이지문 중위처럼 진실을 밝혔다면 당시에는 부당한 처분을 받았겠으나 조국에 떳떳한 모습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수도,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음으로써 감옥에 갇히는 불행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 두 사건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진실을 밝혔던 이 중위의 폭로는 당시 여당인 민자당이 총선에서 참패하게 하는 여소야대 국면을 초래한 반면, 김하영 씨의 허위진술은 박근혜를 당선시키는데 기여했으므로 진실과 거짓은 이처럼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은 거짓이 없다면 선거에 의해 권력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스가 자신의 회사인 것도, 자신이 BBK를 설립한 것도, 자신을 반대하는 인물을 불법으로 사찰하여 몰래 탄압한 것도 밝히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일 숨기지 않았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을까. BBK에 잘못 투자하여 자살한 사람까지 있는데도. 아무리 돈이 많고 대통령까지 지냈어도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라는 셍크먼의 질문의 답을 아주 쉽다. 유권자의 어리석음이다. 그런데 유권자의 어리석음은 선거를 이길 수 없는 집단의 거짓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런 속임수가 어떻게 통할 수 있느냐는 것을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 거짓과 진실을 분간하게 만드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언론이지만, 이미 기득권이 되어 기득권 편에 선 언론은 거짓을 진실로 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앞잡이의 역할에 충실하다. 한국의 조·중·동과 미국의 폭스채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립서비스가 아무리 현란하다고 하더라도 유권자가 깨어있다면 넘어가지 않는다.
최근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유한국당(이하 자한당)은 이명박근혜 시절에 서울시장 박원순을 깎아내리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친환경 급식을 한다는 이유로 공격했는가 하면 박 시장이 하는 모든 행정에 대해 트집을 잡아 비난하기에 급급했다. 그의 아들이 병역을 기피한 것도 아니고 공익근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병역기피로 몰아세웠다. 하물며 초등학생이 그린 통일염원 그림에까지 종북 운운하며 이념 프레임을 걸었으며 홍준표는 한 차례도 사법시험에 응시한 적이 없는 조국 수석에 대해 사시에 대한 한풀이를 한다고 공개석상에서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불특정 다수인 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면 자기들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인구감소다. 작년은 신생아가 사상 최초로 40만 명 이하가 되었다. 십수 년 전부터 정부에서는 온갖 처방을 내렸지만 백약이 무효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최근 정부에서는 11살까지 아동수당을 주겠다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대 이유가 그럴듯하다. 부유층에게까지 주는 것은 과도한 복지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니 상위 20%에게는 주지 말자는 것이다. 그럴듯하지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판단하면 웃기는 논리다. 상위 20%에게 월 10만 원은 껌 값에 불과하다. 상위 20%는 세금을 많이 내기에 10만 원을 돌려줘도 아무것도 아니다. 아니면 상위 20%에게는 세금을 조금 더 부과하면 된다.
하지만 자한당은 과도한 복지는 그리스를 예로 들며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주장하고 주 언론들은 맞장구를 치며 동조한다. 그러면서도 상위 20%에 대한 증세는 반대하고, 증세라는 논리에 어리석은 유권자들은 속는다. 그러나 상위 20%를 가려내기 위해 동원되는 행정력 낭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부유층의 증세도, 공무원 증원도 반대하는 그들의 과대한 복지 주장은 언론의 응원을 받으며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유권자가 속아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아이가 셋이었던 나는 뉴질랜드에서 시민권자도 아닌 영주권자로 살 때 재산에 관계없이 주는 아동수당이 큰 도움이 되었었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선했을 당시를 되돌아보자. 둘 다 거짓말쟁이들이니 관심 없다는 것이 내 아이들의 생각이었으며, 어차피 클린턴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많았다. 같은 거짓말쟁이라도 그 둘에게는 차이가 있다. 큰 거짓말쟁이와 작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와 내통하며 해킹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큰 거짓말이고 개인의 편리를 위해 공적인 이메일을 사적인 공간에 둔 것은 작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같은 거짓말로 몰아갔고 유권자들은 그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다는 평범한 진리는 어디로 갔을까.
젊었을 때의 나 자신을 반성해본다. 유신 시절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투표할 때는, ‘누구를 찍으면 좋을까요?’하고 침을 튀겨서 아무 생각 없이 찍었다. 그만큼 놀러 다니기 바빴을 뿐 선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놈이 그놈이지 내가 투표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바로 그것이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선거에서 이기려는 세력이 노림일 수도 있다. 시민이 깨어있지 않으면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국은 미국과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 그런 특수성을 최대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종북좌파 논리를 이용하는 집단이다.
내 부모님처럼 공산당의 피해자인 사람이 있을까. 모친은 스물두 살의 한창때 아이를 몸에 지닌 채 자기 남편이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목격했고, 부친은 부모와 처자식을 평양에 둔 채 홀로 월남하여 평생을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워하며 제 명을 다하지 못했다. 북한의 김일성 집단은 내 조상의 원수나 다름없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