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과 2004년 미국에서 부시가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2012년 박근혜가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유리한 정당과 후보에 투표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셍크먼은 왜 우리들은 어리석은 투표를 할까?라고 질문했다. 나만 궁금한 토픽이 아니라는 것에 흥미가 끌렸다.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되돌아 가본다.
1960~70년대 박정희의 공화당은 고무신을 동네에 돌렸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에 의하면 그건 좋은 짓이 아니었다. 선생은 그런 후보에게는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선생님이 그건 나쁜 일 이랬어, 그러니까 엄마는 주는 건 받고 투표는 다른 사람을 찍어야 돼.” “받고 안 찍으면 안 되지, 안 받았으면 몰라도. 인두겁을 쓰고 그러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란다.” 가르치려 드는 초등생에게 젊은 엄마는 다른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김대중이는 뿔갱이라더라, 에구 무서라!”
전쟁 때 공산군에게 경찰 남편을 생으로 잃고 스물두 살에 뱃속에 아이를 가진 채 청상과부가 된 경험이 있는 여인에게 ‘빨갱이’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선거철만 되면 아버지는 공짜 막걸리를 얻어 마시곤 했다. 반세기 전의 기억을 꺼내는 것은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무신과 막걸리가 세련되게 현대에 맞게 변했을 뿐이다.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민주국가에서 ‘선거의 4원칙’은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다. 당연해 보이는 이 원칙들이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부자들이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에게 엘에이의 홈리스와 똑같이 한 표씩 가졌다는 것만큼 불평등한 것은 없다. 삼성의 이건희가 쪽방에서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노파보다 10배나 100배의 권리를 갖는 것도 불만일 텐데, 같이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에서는 보유하고 있는 주식 수만큼 투표권을 행사하는 매우 이성적이고 아주 평등한(?) 규칙을 가졌고 거기에 익숙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위에 성립된 민주주의는, 가진 것만큼만 평등한 자본주의의 불평등성과는 근본적으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자본이 권력을 가졌을 때 효과는 그들이 욕망을 이루기 쉽게 만든다.
아흔아홉 마지기를 가졌어도 백 마지기를 채우고 싶은 욕심, 돈은 실컷 쓰고도 남을 만큼 갖고 있으니 유명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식솔과 후손들에게 대대로 부를 전하고 싶은 바람, 일 안 하고도 여유롭게 살고 싶다는 희망, 남들보다 더 많은 부를 갖고 싶다는 욕구는 – 다른 사람의 눈에는 탐욕으로 보일지라도 –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속성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은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다. 세금을 줄이고 경쟁을 강화하는 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런 법은 엘에이 홈리스와 쪽방촌 노파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들에게) 불평등한 민주주의는 홈리스나 노파에게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을 만들려는 자들에게 표를 주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내버려둬서는 불가능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일은 그들이 잘하는 일이다. ‘자본(돈)’이라는 자본주의 최고의 무기를 갖고 있기에 가능하다. 게다가 조상으로부터 세습되어온 노하우와 인맥도 있으며 현재 갖고 있는 권력도 있다. 다음 선거만 잘 넘기면, 또 그다음 선거만 잘 넘기면 그들의 이익은 계속 유지된다. 홈리스와 노파 같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을 속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유권자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셍크먼에 의하면, 자신에게 투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기득권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착각을 심어준다고 한다. ‘맞아, 내가 저들에게 투표하면 나도 저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도록 끊임없이 캠페인을 벌이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오히려 피폐하게 만드는 후보와 정당에게 표를 준다고 역설한다.
그들은 시장경제와 자유경쟁체제를 역설함으로써 누구나 자신들과 같은 기득권을 누리거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는다. 이미 자본에 장악당한 언론매체들은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들, 주식으로 큰돈을 번 사람들, 출세한 스포츠 스타들이나 연예인들 기사를 끊임없이 싣는다. 실제로는 그보다 실패한 사람들의 경우가 비할 수 없이 많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플라이급 복서가 미들급 선수와 싸워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헤비급 선수라면 제로다. 골목시장이 대기업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확률도 제로다. MB의 도움 없이 다스가 저렇게 클 수 있었을까. 경쟁은 허울만 그럴듯한 논리로 양극화만 심화시킬 뿐이지 현대사회에서 공정한 룰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이론을 개발하는데 무기(돈)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유명한 학자들을 – 양심은 빈약한 – 동원해서 그들에게 유리한 논문이나 이론을 발표하게 하고, 언론매체는 이를 끊임없이 게재하여 유권자를 현혹시킨다. 그 반대논리는 언론에 게재되는 일이 별로 없다. 노벨상을 수상해도 대부분 단신으로 그친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이건 시절의 래퍼곡선과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다. 이들은 레이건 정부 부자감세정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들은 사실을 왜곡시킨다. 그리스의 부도가 과도한 복지 탓이라고 모든 언론이 과장해서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부정부패가 원인이라는 게 학자들의 정설이다. 멀쩡한 사람이 정부의 복지수당을 타 먹으려고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고 장님으로 등록했고, 그 수가 인구 10만 명도 안 되는 섬에서 수천 명이었다는데 어떻게 안 망할 수 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에서는 과도한 복지 탓이라고 매도했다. 월남이 패망한 것도 공산당 때문이 아니라, 베트남 국민의 민족주의와 월남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트남 민족주의의 승리에 대해선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해방 후 남한 정부의 민족주의자들은 이승만 정부의 친일세력에 의해 철저히 숙청당하거나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필요한 공포심을 조장한다. 1950년대 초 매카시즘은 유명하다. 위스콘신의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 상원의원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어떤 근거도 없이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한 주장으로 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났고,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같은 유명 지식인들이 추방되었다. 매카시즘에 동조한 이들은 로널드 레이건이나 월트 디즈니 같은 기득권 세력이었다. 매카시즘은 한국에서 확대 재생산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기 이해를 돕는 동영상 마우스랜드 (Mouseland)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