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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an 20. 2018

미래를 위해 과거를 바라보다(1)

왜 유권자는 어리석은가?

 최근에 개봉된 영화 ‘1987’이 화제다. 31년 전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을 다룬 영화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기억을 그때로 돌렸다.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는 울진 현장에서 일하던 나는, 그 사건을 신문에서 처음 접했을 때 경찰 발표를 믿지 않았다. ‘땡전뉴스’라는 냉소적 비아냥거림으로 TV에서 전하는 뉴스는 도외시했으며 진실을 찾으려고 신문 구석구석을 읽던 시대였다.


 비록 부처님이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설파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대중을 형편없는 존재라고 인식했으면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을까 싶었다. 그래도 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기껏해야 술자리에서 “x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애꿎은 학생까지 죽이고 지랄이야, x 같은 새끼들!”이라고 욕지거리를 해대는 게 전부였다.


 얼마 후 부산에 출장을 갔다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 군중을 처음 맞닥뜨렸다. 그해 6월이었던 것 같다.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길가 빌딩 2층에 있는 경양식집으로 들어가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돌격하고 시위대가 흩어지는 과정을 구경만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위대의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런다고 총(군대)과 칼(경찰)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전두환이 물러설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서른두 살의 나는 그렇게 역사 속의 철저한 구경꾼이자 방관자였다.


 그러고 보니 한국 근대사의 격변기마다 나는 방관자에 불과했다. 4·19나 5·16은 너무 어려서 몰랐고, 10·26과 1980년 민주화의 봄은 군대에 있었으며, 1987년 6월에는 울진이라는 시골구석에 있었다. IMF 때는 이민으로 다른 나라에서 구경만 했으니까, 실질적으로 구경꾼에서 처음 참가자로 입장이 바뀌었던 것은 재작년 말과 작년 초에 있었던 촛불시위였던 셈이다. 그나마도 제주에서 두 번, 서울에서 한 번 참가한 것뿐으로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돈 몇 푼 낸 것이 다였다.


 그랬어도 본 것도 느낀 것도 있었다. 그것은 깨어있는 시민이 만들어내는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것은 헤겔이 주창했듯 ‘정(正)-반(反)-합(合)’으로 행진하며 발전하는 역사의 과정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YS와 DJ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는 것을 보고 절망했었다. 이놈(?)의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중생의 착각이었다. IMF가 터졌을 때는 그놈(?)의 언구제러블(구제할 수 없다는 의미의 한영 합성 속어) 나라는 망해도 싸다며 고국에 대해 악담을 해댔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와 대중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의 자가당착에 불과했다.


 가해진 힘이 강할수록 반발하는 힘도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것은 ‘뉴턴의 운동 제3법칙’이다. IMF가 없었다면 DJ가 대통령이 됐을까. 오바마도 마찬가지다. 2008년의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달라졌다고 보는 언론인들이 많다. 2008년 11월 4일 컴컴한 새벽에 출근하러 가면서 투표장에 들려 시민권자로서 첫 번째 투표권을 행사했다. 오바마를 위시한 민주당 인사에게 표를 주었다.


 오바마가 당선되자 미국은 물론 세계가 떠들썩했다. 흑인은 창조주에게서 열등한 재능을 부여받았고, 그 열등함 때문에 태생적으로 노예로 사는데 적합한 사람들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노예제도라는 수치스러운 원죄 위에 건국된 미국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영원히 인종차별주의는 사라졌다면서 미국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열광했다. 과연 그랬을까? 천만의 말씀이었다. 백인우월주의의 반동의 힘은 도널드 트럼프라는 괴물을 당선시켰다. 사람들이 우려했던 그대로 그는 이성과 대화 대신 돈과 군사력이라는 힘으로 주변 국가를 위협이나 하는 깡패국가로 미국을 전락시켰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엘 고어가 당선되는 걸 당연시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그래도 플로리다 주에서 재개표해서 결과가 뒤집어지는 것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으나 고어는 연방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패배를 수용했다. 실망은 컸으나 한국에서 대통령 병에 걸린 환자 3김 씨에게 실망했던 경험이, 그것도 미국의 위대한 점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사람들의 염려를 헛되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부시도 미국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9·11 사건으로 침체되는 경기를 부동산 경기 활성화로 붙들려는 시도는 월가의 탐욕과 호응하여 서브프라임 사태를 불러왔고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내가 레이오프 되는 피해자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2012년 한국에서의 총선과 대선은 반전의 연속으로 흥미는 있었지만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웠다. MB의 실정과 더불어 통합된 야당이 대승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결과는 참패였으며 문재인이 당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그리고 실망과 혼란은 ‘왜?’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이유가 뭘까? 미국의 민주당은 증세와 복지 확대를 주창하는데 반하여 공화당은 감세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로 서민들에게 돈이 흘러들어가게 하자고 주장한다. 선진국답지 못한 미국의 수치 가운데 하나인 의료보험제도를 개선해서 의료의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정책을 펴는 민주당에 주 혜택자인 서민들이 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지. 대선 토론 때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형편없는 박근혜의 말주변과 토론 실력을 보고도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표를 주는 거지. 애초부터 내 견해가 틀린 걸까. 틀렸다면 어떤 생각이 잘못일까.


 이유를 알고 싶었다. 신문과 뉴스를 읽고 보고 관련 서적을 찾아보며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다녔다. 대부분 뜬구름 잡는 식의 글들이었고 실체가 분명히 잡히지 않는 말잔치들뿐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책이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 (원제: Just how stupid are we?)’이었다.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리처드 셍크먼(Rick Shenkman)’이 2008년에 발간한 서적이지만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된 것은 2015년이었다.


 민주정부와 유권자 모두를 비판한 이 책에서, 셍크먼은 미국 유권자의 무지를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로 뽑았다. 지난해 말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시끄러웠을 때 미국 어느 방송국에서 대도시 번화가 행인들에게 세계지도를 보여주며 ‘North Korea’의 위치를 물었다. 동유럽이나 중동 부근을 가리키는 사람들이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미국인들은 무식했다. 국제정세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 이슈에 대해서도 무지해서 상속세를 폐지하면 혜택을 보는 것은 상위 1%의 납세자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그 정도는 아니어서 비교할 수 있는 적당한 사례는 아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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