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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l 03. 2018

월드컵 관전기 - 3

(조별 리그를 마치고 16강이 확정된 6월 30일에 쓴 글)


 영국의 메이 총리는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23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고 러시아 월드컵을 보이콧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러시아 첩보국에서 일하며 영국에 정보를 제공한 이중 스파이 세르게이 대령과 딸의 독살을 시도한 사건 때문이었다.


 미국까지 영국의 주장에 동조하며 러시아를 압박했으나, 러시아의 푸틴은 아무 증거도 없는 허위 주장이라며 일축했고 월드컵은 예정대로 러시아에서 개최되었으며 잉글랜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참가했다. 잉글랜드는 손흥민의 팀 동료 해리 케인을 앞세워 가볍게 2승을 먼저 거두었고 예선 조별 리그 마지막 날 케인을 비롯한 6명의 주전을 벤치에서 쉬게 하고는 벨기에에 1대 0으로 패배하는 것을 지켜보며 16강전에 대비했다.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 등 프리미어리그를 주름잡던 왕년의 스타들로부터 완전한 세대교체를 이루고 24살의 해리 케인이 최고의 공격수로 활약하고 있는 잉글랜드는 H조 1위인 콜롬비아에게 무난히 승리를 거두고 12년 만에 8강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1위를 벨기에에게 내준 덕분에 대진 운이 좋아져서 승운만 따라준다면 28년 만에 4강과 52년 만에 결승까지 올라감으로써 4년 전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과 함께 1 무 2패의 비참한 성적으로 예선에서 탈락하여 축구 종주국으로서 손상된 체면을 회복할 수도 있게 되었다.


 메이 총리는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월드컵 출전을 보이콧할 수 있었을까? 절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러시아가 했다는 물증은 없지만 누구나 푸틴에 의해 자행되었을 거라는 심증은 충분했다. 푸틴은 구 소련의 KGB 출신이었고 사용된 신경계 독극물은 러시아에서 발명된 것이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일찍 발견된 덕분에 세르게이 대령 부녀는 목숨까지 잃지는 않았지만, 메이와 푸틴의 싸움에서 푸틴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독일의 분데스리가,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와 함께 세계 3대 리그라고 일컬어지는 프리미어리그를 운영하는 영국에서 월드컵을 보이콧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확신이 푸틴에게는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어제까지 조별 리그를 끝내고 오늘 하루를 쉬고 내일부터 16강전에 들어감으로써 중반전에 돌입한 월드컵에서 난데없는 정치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문이든 방송이든 인터넷 포털사이트든 월드컵 이야기로 도배된 가운데, 축구팬으로서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이야기도 편협하고 왜곡된 문외한의 사견일 뿐이라는 것을 미리 밝힌다. 전문가들의 관전기는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으니까.


 FIFA 랭킹 57위의 한국이 1위 독일을 이긴 것에 대해 한국뿐 아니라 멕시코까지 흥분하고 있다. 아니 두 나라뿐 아니다. 유럽을 포함해서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한 중국까지 난리다.(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닌겨!) 특히 2대 0으로 이겼다는 것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물론 기분이 째진다. 한국이 독일을 상대로 이겼는데 기분이 안 좋을 한국사람이 있을까.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스포츠에서, 그것도 2대빵인데.


 그러나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승패에 관계없이 독일에게 졌더라도 우리 선수들이 그렇게만 싸워주었다면 칭찬받아 마땅하다. 90분 동안 112킬로를 뛴 독일 선수들보다 우리 선수들이 5킬로를 더 뛰었다. 스웨덴 전에서는 그 반대였다. 스웨덴 선수들보다 5킬로를 덜 뛰었다. 스웨덴은 한국을 이길만했고 한국은 독일에 이길만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격언이 현실이 되었으니까.


 1대 2로 졌어도 멕시코 전에서도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다. 스웨덴 전에서도 그렇게만 했다면 비록 졌더라도 격려를 받아야지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니다. 3전 전패로 탈락한 이집트도, 1무 2패로 탈락한 모로코나 아이슬란드도, 1승 2패로 탈락한 페루나 나이지리아도 열심히 최선을 다했으니 떳떳할 자격이 충분하다. 나라를 대표해서 최선을 다한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 격려와 함께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과정도 결과만큼 중요하다는 점에서 비록 16강에 진출해서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다 기록을 세웠더라도 일본은 비난받아도 싸다. 야비한 섬나라 근성을 세계만방에 보여주었으니까.


 지금은 무관으로 전락했지만 과거 한중일 세 나라를 주름잡았던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수 이창호라는 인물이 있었다. 13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당시 가장 인기 종목인 바둑에서 중국 최고수들은 물론 그의 스승 조훈현을 비롯해 국내 프로기사들도 2000년을 전후해서 이창호 앞에만 앉으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창호는 세계의 모든 프로기사들이 연구하는 공적대상 1호가 되었다. 그의 기풍을 배우고 그가 두었던 기보를 분석하며 약점을 찾았다. 10년 이상 세계대회를 석권했던 그도 결국은 약점이 드러났고 패배하기 시작했다. 세계정상이란 그런 것이다. 일단 세계정상에 오르면 모든 경쟁자들이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 연구하고 분석해서 약점을 찾아낸다.


 과거 이탈리아 축구가 빗장수비로 세계를 제패했을 때도 그랬고, 전원 수비 전원 공격으로 대표되던 네덜란드의 토털사커도 결국 깨졌으며, 개인기 위주의 현란한 브라질 축구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서 1대 7로 대패하지 않았던가.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4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나라들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전 대회 우승팀의 징크스도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과 같은 조에 편성된 멕시코와 스웨덴은 독일을 부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독일은 전 대회 우승팀이자 랭킹 1위라는 명성에 갇혀 상대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에 명성을 더하고자 검증되지 않은 신예들을 대거 발탁한 뢰브 감독과 몇 차례 결정적인 슛이 조현우에게 번번이 막히자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던 독일 선수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후반전에 스웨덴이 멕시코를 이기고 있다는 정보가 뢰브 감독을 통해 선수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 콜롬비아가 세네갈을 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10분 동안 볼을 돌렸던 비겁한 일본 선수들처럼 – 조별리그 탈락 걱정에 선수들은 더욱 위축되고 불안한 플레이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리 선수들은 독일과는 상대적으로 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이겨보자고 투지를 불태우고 더 많이 뛰고 더 적극적으로 대들었던 것이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그랬기에 수비수도 아닌 세계적인 공격형 미드필더 토니 크로스가 문전에서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김영권에게 흘러간 볼이 골이 되었다. 독일 수비의 핵 제롬 보아텡이 스웨덴 전에서 두 차례나 옐로카드를 받는 바람에 출전하지 못한 것도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이 세 가지 승리 요인은 우리보다는 상대 독일 측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우리 측에서는 누구나 꼽는 조현우의 선방과 승점 0을 갖고 돌아갈 수 없다는 선수들의 위기의식 그리고 결정적 실수가 잦아 최종 수비수로 부적합한 장현수를 미드필더로 돌린 세 가지를 축구 문외한이지만 축구 팬으로서 승리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월드컵 경기가 없는 오늘 하루도 이렇게 허전한데 월드컵이 끝나면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할까?

 휴, 그것이 걱정이다, 하릴없이 세월을 죽이는 건달은!


 <후기>

 과정도 결과만큼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결과만 중요시하는 분위기에 동조하기 싫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도 좋다고 생각하는 세상인심에 강하게 저항합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자본주의 사회가 양극화로 치닫는 것도 결국 결과만 생각하는 탓이 아닐까요?


 인생도 스포츠와 유사합니다. 인생의 끝이 나쁘다고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까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래서 죽은 후에 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 신은 결과보다는 그 사람이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과정을 더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여길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야 마음이 편해지니까요, 하하하.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비전문 아마추어의 러시아 월드컵 관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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