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시작한 듯한 새해가 오늘로 반환점을 지나고 어느덧 7월이다. 살아온 날은 그만큼 길어졌고, 살아갈 날은 그만큼 짧아졌다.
어제는 일기예보와 다르게 비가 내리지 않아 모처럼 운동하겠다는 생각으로 새벽 5시경에 나갔다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를 만나 그냥 돌아왔다. 그때부터 시작한 비가 오늘도 줄기차게 내린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바람을 동반하지 않아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맞은편 아파트 지붕 위로 보이는 하늘이 온통 시커멓다. 고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어울리는 날이다.
간밤에 프랑스가 아르헨티나를 이기고 우루과이가 포르투갈을 깨뜨렸다는 월드컵 소식을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하이라이트를 보았다. 유럽과 남미에서 승패를 주고받았다. 현역 최고의 스트라이커 호날두와 메시의 팀이 탈락함으로써 축구는 팀이 하는 스포츠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가 있어도 다른 사람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는 스포츠라서 흥미를 더한다.
오늘 저녁에는 스페인이 개최국 러시아와 8강 진출을 놓고 승부를 겨룬다. 스페인에서는 16년 전 한일월드컵에서 개최국 한국에게 승부차기에서 패배한 기억을 되살리며 미리 호들갑을 떨고 있다.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두 골을 잃어버려 억울하게 졌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주심을 맡았던 이집트의 간도르 씨는 공정한 판정이었다고 주장한다. 지금 비디오를 다시 돌려봐도 그때의 판정은 옳았다는 거다.
비난받을 일이 벌어졌을 때 변명거리부터 찾는 것은 비겁한 자들이 늘 하는 짓이다. 한때 식민지 남미에서 착취한 부와 무적함대로 세계를 제패했던 스페인이 오늘날처럼 쇠락한 데는 그렇게 비겁한 국민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당시의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으로 왕실의 창고마다 차고 넘쳐났는데, 이는 물가폭등으로 이어져 양극화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를 비롯하여 역사 속의 어떤 제국도 양극화를 동반한 부는 국가를 패망케 하는 재앙이었지 결코 축복은 아니었다. 그런 교훈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를 닮은 미국은 부시를 대통령으로 뽑아 경제위기를 당하여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가, 다시 트럼프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하여 양극화를 다시 촉진시키고 있다.
월드컵 개최국 러시아의 플레이를 보면 2002년의 한국을 많이 닮아있다. FIFA 랭킹 70위의 러시아가 10위의 스페인을 통쾌하게 부수는 업셋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양극화로 고통받는 서민들이 잠시나마 설움을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물론 16년 전처럼 스페인은 패배를 개최국의 프리미엄 탓으로 돌리겠지만.
그런데 여기에도 재밌는 사실이 숨어있다. 한일월드컵에서 공동 개최국이어서 오심 논란이 있었지 개최국이 아니었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는 판정이었다. 오히려 국제 축구계를 주름잡는 유럽의 팀들에게 심판들은 관대하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한국에게 패배한 팀의 변명에 불구한 오심논란에 동조하는 한국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들일까. 그렇게라도 해서 튀어보려거나, 무언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양 자가당착에 빠졌거나 아니면 무슨 반사이익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100여 년 전에도 그런 인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한일합방에 찬성하고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조선 사람들이. 한 달 전까지만도 있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근혜를 석방하라고 시위하던 사람들이.
오늘처럼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사색할 수 있어서 좋고,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운동도 하고 뒷산에라도 오를 수 있어서 좋다. 눈보라가 치거나 비바람이 불거나 일터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선택이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벌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노예상태에서 벗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 행복한 하루다.
- 2018년 칠월 초하루 여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