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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l 03. 2018

불행한 인생

법륜의 즉문즉설을 듣고

 아이들을 키울 때 일이다. 연년생 아이들이 동시에 기저귀를 차고 다닐 때는 똥오줌만 가려도 살 것 같았고, 걷기 시작하며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는 언제 말귀를 알아들을까 생각했으며, 아이들이 자라 유치원에 다니면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빨리 가기만 바랐다.


 그렇게 다가올 미래를 줄기차게 기다리면서도 자신이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다. 지천명이라는 나이를 지나 이순이 되어서도 어리석음은 끝나지 않아서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을 모른다. 아이들이 짝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기다리고 가정을 가진 아이는 아이가 생기기를 염원한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이들이고 공부를 하는 것도 내가 아니다. 직장을 구하고 짝을 만나는 것도 아이들이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내가 아닌 아이들의 몫이다. 내가 할 수 있거나 하고 있는 일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하는 일에서 만족을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파트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고 차량이 진입할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아파트 사이의 넓은 공간이 있다. 오후가 되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야구를 하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뛰어노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때로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는 아이들이나 어린애를 안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난다.


 ‘아이들이 저렇게 어릴 때 정말 예뻤는데. 아이들이 저만했을 때가 정말 행복했는데.’

 나이가 들어 과거를 반추하면서 지내게 되자 현재에서 멀어질수록 행복했던 기억이 새로워서, 아이들이 대학생일 때보다는 중고등생일 때가, 그보다는 초등생일 때가, 유치원에 다닐 때가 그보다는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저귀를 갈며 아이들의 구수한 똥냄새를 맡았던 그 시절로 가서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는 후회감이 밀려온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도 그 어떤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집권자도 돌이킬 수 없는 게 세월인데, 그때는 만족할 줄 모르고 다가올 미래만 기다리며 지내다가, 그 좋던 세월 다 보내고 이제 와서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인가!


 한창때의 삶에는 미래만 있었고 나이가 들어서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한다. 어느 부분에서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Present=Gift)를 의식하지 못했으니 조물주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선물(Gift)조차 받을 수 없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 두꺼운 지갑을 꺼내지 않는 스크루지(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주인공)는 현재의 삶을 위해 얇은 지갑을 기꺼이 꺼내는 밥 크래칫(스크루지의 종업원) 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이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봄에 세상에 나와 가을에 죽는 곤충은 내년의 봄을 모르듯, 어리석은 인간은 되돌릴 수 없게 돼서야 똑똑한 척하며 살았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다. 우주의 무궁한 시공간 속에서 인간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벌레와 다름없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데 실패한 사람이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다. 과거에 행복했던 자만이 지금도 미래도 행복할 자격이 있다. 과거에 불행했던 사람은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기 힘들다. 머리 좋은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재미있어하는 사람을 못 이긴다는 격언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증명한다.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모든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한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바꾸려는 것은 우공이산(愚公移山)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산이 가로막고 있다면 산을 돌아 비켜 가면 그뿐이지 산을 옮기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고사(古事)에서는 우공에 감동한 과거의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주었다고 전하나 현재에 존재하는 옥황상제는 바보 천치라고 나무랄 것이 틀림없다. 산을 옮기려는 우공은 불행을 자신의 대에 그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물려줄 정도로 어리석었을 뿐이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부모, 형이나 동생을 바꾸려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자신을 바꿔 그들에 맞추는 것은 깨달았기에 가능한 현명함이다. 남을 변화시키는 것은 산을 옮기겠다는 생각과 다름이 아니고, 나를 바꾸려는 자세는 산을 비켜가는 지혜다. 남의 행복에 기대서 자신이 행복해지겠다는 것도 같다. 스스로가 행복해야 주위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지 않던가. 가을에 수확하기 위해서는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땀 흘리는 것은 당연하다. 인생의 가을도 마찬가지다. 청춘시절 만족할 만큼 씨 뿌리고 수고하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을에 거둘 것은 별로다. 없는 수확으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자신을 바꿔야 한다. 가을이 왔음에도 여름이라고 고집하는 이도 행복하기 힘들다. 수확한 것을 창고에 쌓아둘 뿐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후기>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경험에 근거해서 소화한 것을 나름의 변변찮은 글로 옮겨보았습니다. 같은 사람이 하는 같은 말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하듯 다른 사람은 또 다르게 받아들이겠지요.


 법륜이 즉문즉답이라고 하지 않고 즉설이라고 명명한 것은 인생에서 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바꿔 말하자면 개개인마다 답이 다 다르고 여럿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답은 오직 한 개밖에 없다고 오랜 시간 배운 탓에 세뇌된 우리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법륜은 머리에서 가슴까지가 가장 먼 곳이라고 말합니다. 알고 있어도 깨닫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입니다. 저는 머리와 가슴 사이보다 더 먼 거리는 가슴에서 발까지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아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이순의 나이에도 어리석음을 반복하며 불행을 부르며 사는 인생이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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