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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Apr 08. 2020

노인은 왜 꼰대가 될까?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지난날 우리가 만났던 노인들을 돌이켜보면 쉽다. 이것을 원시와 근시라는 제목의 지난 글에서 표현했던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 오는 노안은 시력을 원시로 만들어 눈앞의 물체보다는 오히려 적당히 먼 거리가 잘 보인다. 마찬가지로 기억도 원시가 돼서, 어제 일보다는 10년 전이나 20년 전의 기억이 더 선명하다. 살아갈 날에 희망을 품기보다는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상과 추억에 집착하게 되어 말까지 많아진다.

       

 자식이나 조카들과 대화할 때, 불필요한 말을 하는 자신을 깨닫곤 한다. 무의식적으로 꼰대가 된다.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까닭이 보였다. 말하고 싶다는 욕구와 기억의 노안 현상이다.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반작용으로 하고픈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하려던 말을 잊거나 실마리를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조금 전의 생각을 까맣게 잊는 기억의 노안 탓이다.

       

 이런 경험을 수차례 되풀이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은 다음 대화에서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가, 머리에 떠오른 순간의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말로 전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연배끼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젊은이와 이야기할 때는 그렇지 않아서 본의와 다르게 꼰대가 되기도 한다.


 경제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독일의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코르넬리아 토프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일반적으로 침묵보다는 말을 좋아해서 대화가 끊기면 어색해하거나, 심지어 혼자 고요하게 있는 상태를 못 견디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침묵을 난감하게 느끼는 이유를 침묵 자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조용할 때 찾아오는 생각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교수는 분석했다. 즉,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불안하며, 혼자 있는 조용할 때 찾아오는 생각이 두려워서 말할 거리를 찾으려 애쓰며, 홀로 있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하려 한다는 이론이다.


 토프 박사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어떤 사람과 대화가 끊어져 어색하거나 불편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옛날 맞선을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수긍할 것이다. ‘잘 알면 세 마디로 족하다. 잘 모르니 서른 마디가 필요한 법’이라고 말한 어느 독일 작가의 말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느라고 말이 장황해진다는 논리다. 약점을 지적당할 때 말이 많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수로 노출된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려면 짧은 말로는 곤란하다.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나, 이처럼 노인이 말 많은 것은 좋은 것보다 불리한 이유가 더 많다.

  

 직장에 다닐 때 받았던 중간관리자 교육의 대화법 시간에, 대화는 경청(Listening)이라고 가르쳤다. 경청은 그냥 듣는 것(Hearing)과는 다르다. 무엇이 다를까? 화자(話者)에게 공감(共感)하면 Listening이 되지만, 없으면 Hearing이 된다. 공감을 뜻하는 영어 Empathy 또는 Sympathy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감정의 공유를 넘어 상대에게 동의를 표시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을 포함한다. 이쯤 되면 경청하는 일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한국인, 특히, 주입식 교육과 훈시나 강요처럼 일방적 소통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 경청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인치고 토론 잘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증거다. 오죽하면 정치와 종교에 대한 화제를 금기시할까. 대화법 교육이 끝나고 시험을 봤는데, 모르긴 몰라도 어떤 시험에서건 빵점을 맞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네댓 개의 예시 중에서 선택하는 20여 개의 문항에서 단 한 개의 정답도 고르지 못했다.


 예를 들면, 문제는 이런 식이었다.

 

 - 아래는 형과 동생의 대화다.     

 형: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동생: 엄마는 형만 좋아하고 나는 천덕꾸러기야. 맨날 나보고만 뭐라고 해. 공부도 형만큼 못하고 형이 하는 것 좀 보고 배우라는 거야. 언제 내 옷 한 번 사준 적 있어? 형에게만 사주잖아. 나는 형이 입던 것만 물려받고 말이야!          


(문제) 형이 말할 차례다. 소통을 위한 가장 올바른 대화를 선택하시오.

  

 - 고른 틀린 답: 그런 생각은 잘못이야.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어. 엄마에게는 너나 나나 똑같은 자식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 문제가 요구하는 정답: 저런, 너 많이 서운했구나.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된다. 내가 너라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겠다. 내가 다 미안하다. 나중에 엄마에게 조용히 말씀드려보자.

 

 오답은 공감이 전혀 없는 일방적인 훈시 같은 대화법이고, 정답은 대화 상대에 대한 동의와 지지가 포함된 리스닝이다. 감정이 공유된 동생은 고조된 감정이 저절로 누그러지고, 스스로 마음이 너그러워져 잘못을 알게 된다는 것이 대화법 강의의 포인트로, 시험 결과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인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소통의 대화법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아서, 부하직원을 다룰 때 직설적으로 지적하고 소리를 크게 내기도 했다. 그래도 효과가 없지는 않았는지, 2008년 말, 나를 해고한 부사장에게 조직관리를 잘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언젠가 뭔 대학의 교수라는 사람이 노인의 말에 관해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노인들은 첫째, 말을 지루하게 하고, 둘째,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으며, 셋째, 자꾸 훈계하려 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모두 꼰대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젊었을 때는 상대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노인들은 자기중심으로 하고픈 이야기만 되풀이하기 때문에 지루하고, 나이가 들면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오래 듣지 못한다고 해석했다. 즉, 낮은 자존감의 보상심리에서 자꾸 말하려 들고, 굴곡진 과거에 대한 후회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 든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자존감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눈이 침침해지고, 기억력이 둔화하면서 함께 낮아지는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유일한 해결책은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하신 말씀 지난번에도 하신 거 아세요?’ 이런 말을 자식이나 조카에게 들었다고 자존감까지 낮출 필요는 없다. ‘아, 내가 그랬구나! 나이가 들었으니까.’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우울감은 현실과 생각의 괴리에서 오며, 우울감은 자존감과 직결한다. 인정하지 않으면 괴리는 커지지만, 인정만 하면 현실과 생각의 차이는 사라진다. 언젠가 지하철인지 버스정류장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기억이 있다.

 - 말이 많았다고 후회하지 마세요. 말이 많은 것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생긴 습(習)입니다. 말 많다고 누구에게 들으면 그냥 인정하세요. 흥분된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점점 말이 조절됩니다.

  

 <후기>     

말하기 좋다하여 남의 말 말을것이     

남의 말 내가 하면 남도 내말 하는 것이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어렸을 때 외웠던 '말'이라는 제목의 시조입니다.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세기도 전에 외운 것은 술술 나오는데, 요즘에는 암기는커녕 잊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기록해두고는 그 장소를 잊어버려 당황하는 일이 흔합니다.


 말할 대상 없이 혼자 사는 저는 주로 컴퓨터와 TV, 책만 있으면 시간을 잘 보냅니다. 침묵 속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의 두 글자가 의미하듯 누군가와 말하지 않고 살 수 없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이민 생활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도 소통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떡하다 인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속 시원하게 터놓고 말할 상대가 있었다면 실수를 조금이라도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연말과 연초에 매우 힘들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말로써 생긴 일이었지요. 소통을 제대로 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가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무척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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