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조 Oct 30. 2016

비정상적 사람들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되는 대통령

1.

지난 7월 한 사람이 흙으로 돌아갔다. 계절이 순환하듯 낳고 죽는 일이 자연현상의 일부이기는 하나, 사람의 일이기에 낙엽 지고 눈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대할 수만은 없다. 1947년생이니까 70세를 다 채우지 못했다. 담도암 진단을 받고 6개월 정도 더 살았을 뿐이었다. 나와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인연이기는 해도, 전해 들은 고인의 인생만큼은 평범하지 않았다.


1960년대 군대생활 중 전우를 사망하게 하는 총기 오발사고를 냈다. 때마침 김신조 무장공비 일단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을 겪었던 군은 두 가지 옵션을 제안했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와 특수부대원으로 장기복무 지원이었다. 고인은 특수부대 지원을 선택했고, 북한 침투 특공부대에 소속되어 실미도 영화에 나오듯 지독한 훈련을 받았다.


1971년 실미도 부대원의 난동 사건으로 부대는 해체되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훈련의 후유증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던 듯하다. 고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서로의 공통 관심사가 바둑이었던 터라 첫 번 대면에서 바둑을 두었다. 5급이라는 고인이 4점을 깔고 두었으나, 말이 1급일 뿐 바둑돌을 잡아본지가 10년이 넘은 나는 두 판을 연거푸 지고 말았다.


제주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달랐다. 으레 하수가 고수에게 당하듯 그분은 다섯 점을 깔고도 내게 판판이 졌다. 그리고 그분의 성격이 일반인과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답지 않게 쉽게 삐지고, 열등감이 무척 심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교적 점잖게 언행을 했지만, 자기 부인에게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심한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어 보였는데, 지인으로부터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일부 이해할 수는 있었다.


1990년대 초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부대원들과 공동으로 정부에 소송을 제기해서 2억 정도의 보상금을 받아냈으며, 훈련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세의 치료는 국가가 부담했다. 혹독한 훈련의 영향으로 관절이 잘못되어 정기적으로 뼈에 주사를 맞았다. 그분의 친구는 같이 훈련을 받았던 동료 한두 명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가까이하거나, 잘 사귀지 못했다.


그분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살았던 집 근처에 새로 사귄 바둑 친구가 미국에서 돌아온 교포라고 했다. 역이민 카페를 운영하는 내게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분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말은 이랬다. “흥, 내가 왜 저한테 소개를 해. 저만 인텔리와 사귀는 줄 알아? 내게도 인텔리 친구가 있다고!”


그 후로도 몇 번 지인과의 모임에서 만났으나, 지난 2~3년간 그분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작년 봄 장인어른 부음 때 문상 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그분에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극심한 시련을 겪은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를 갖기가 어려우며 사교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극한의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내 아버지가 그랬고, 지난봄 남원에서 만난 카페 회원으로부터 들었던 그분의 아버님도 비슷했다.


나는 나 자신도 그런 것이 아닐까 자문해보았다. 평범한 인생을 뿌리치고 이민을 떠나서 처음 겪는 어려움을 경험하고 돌아온 나 자신도 정상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절친들로부터 절교당한 채, 제주에서 외톨이가 되어 인터넷에 글이나 쓰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2.

- 대한민국은 온통 빨갱이들이 설쳐대는 나라다.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등 조국을 위해 순국한 애국자들에게는 몇 푼 안 되는 성금을 주면서도, 세월호 사고로 죽은 아이들에게는 수십억의 보상금을 주고도 모자라 데모까지 하는 나라다.

6·25 사변, 월남전 전사자들에게는 쥐꼬리만 한 보상만 하면서, 인혁당,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수많은 빨갱이들에게는 억대의 보상금을 주느라 나라의 재정이 바닥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같은 빨갱이들이 정권을 잡고 북한에 퍼주어 핵개발을 하도록 돕고, 나라를 위하느라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은 도외시했다.


이달 초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탔던 7호선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 조깅은 해도 지하철에서 서서 가기는 싫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서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지만 빈자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눈앞에 노약자석만 비어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그곳에 앉을 자격이 몇 년 부족했으나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가 허연 나보다 나이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자리를 비워둘 이유도 없었다.


옆자리에는 품위 있어 보이는 우아한 차림의 귀부인이 앉아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무언가 읽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호기심에 곁눈질로 스마트폰을 보았다. 노안으로 작은 글자를 읽지 못하는 노인을 위한 글인 듯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활자가 몇 자 되지 않았다.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귀부인은 화면을 위로 넘기며 읽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서 본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곁눈질로 읽는 문구는 북한의 노동신문만큼이나 선동적이고 악의에 차서 읽는 사람의 품위 있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북몰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실체를 실제로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기가 막혔다. 어버이연합일 수도 있고, 국정원이나 사이버 사령부의 댓글부대가 아직도 비밀리에 활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서로 소통할 생각 없이 자신들만의 언어로 자기들끼리만 소통한다면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극단은 극단을 부르고 결국 파국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에 관련되면 더 그렇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은 서로 극단으로만 치닫다가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던가!


3.

최순실이라는 아줌마 하나가 대한민국을 들끓게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뒤에 숨어서 대통령을 자기 뜻대로 움직인 것이다. 대통령을 동원해서 재벌로부터 800억 원을 뜯어냈고, 자신의 딸에게 불리한 역할을 한 고위직 공무원을 쫓아냈으며, 실력도 자격도 안 되는 딸을 이화여대에 입학시키고 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총장과 교수들까지 자기 집 하인 부리듯 했다.


아줌마의 인생도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1956년생으로 1982년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낳고 1986년 이혼했다. 보통의 이혼한 여자처럼 아이를 자신이 키우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버지 최태민(1912~1994)의 비서였던 정윤회와 1995년 결혼해서 정유연을 낳고 2014년 이혼했다. 최필녀→최순실→최서원으로 두 번이나 이름을 바꾼 것도 범상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최태민의 다섯 번째 부인에게 출생한 다섯 번째 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젊은 시절 겪은 시련은 내 또래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청와대에 들어가 20대 초반 철이 들 때까지 금지옥엽 공주로 지내다가,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저격으로 살해당한 후에는 20대 중후반까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1979년 시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18년을 살던 청와대를 나와 퍼스트레이디에서 평민으로의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그 시련이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당사자 아니면 짐작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렇게 극단의 시련을 경험한 사람은 정상적으로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추락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할 수가 없어 세상만 원망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앞에서 고개도 변변히 들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일개 경호원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자신을 청와대에서 쫓아냈을 때는,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이를 갈았을 수도 있다. 그런 정도의 한(恨)을 품어야 정상일 거라는 짐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정상적인 사람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린다.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소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중반까지 박근혜 씨의 한(恨)을 이해해주고 말이 통하는 사람은 그녀의 동생들이 아니었다. 최순실뿐이었다. 그녀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는 사람은 최태민이 살아있을 때는 최태민이었고 그가 죽은 후에는 최순실이었을 거라는 추측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한국인들이었다. 한이 서린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워서는 안 되었다. 폐비 윤씨의 소생으로 어머니의 한(恨)을 간직한 연산군이 어떠했는지 역사가 알려준다. 520년이 넘는 조선사에서 최고의 간신으로 꼽히는 임사홍도 연산군 시대의 인물이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연산군이 연상되는 것은 대통령 주변에 이정현이나 최경환, 김진태 같은 간신들이 득실대는 까닭만이 아니다. 최태민과 최순실로 이어지는 사이비 종교인을 가까이하는 혼군(昏君)에다가, 그나마 바른 소리를 하는 유승민이나 김무성 같은 이들을 대놓고 멀리하기 때문이다.


4년 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개명한 것도 최순실의 생각이었을까. ‘새’는 ‘신(新)’이고, ‘누리’는 ‘천지(天地)’라는 의미 아니던가. 최순실이 무당이라면 영험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신천지’로 당 이름을 바꾼 뒤, 총선에서 압승하고 대선에서도 이겼으니까. 최순실은 또다시 자신의 이름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다가오는 재앙을 막으려면.

매거진의 이전글 사위傳(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