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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Feb 14. 2017

인투 더 와일드

'Into the wild'라는 영화를 본 것은 비행기에서였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2007년 가을에 개봉된 걸로 봐서 2008년 초 모친상을 당해 한국에 가는 중이거나 돌아오는 중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항공기 이코노미 석에 앉아 앞좌석에 붙은 작은 화면으로 지루한 시간이나 때우려고 무심코 본 영화였으나, 내용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wild'라는 단어는 '자연 그대로'라는 긍정적인 뜻과 '(사람의 성격이) 거칠고 사나운'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 형용사다. 앞에 관사 'the'가 오면 '(자연 그대로의) 야생'이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영화의 제목은 '야생 속으로'라고 번역하면 될 것 같다. 오래전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애틀랜타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주인공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편안한 삶을 추구하라는 부모의 바람을 따르지 않는다. 재혼한 부모의 위선적인 삶과 가식을 경멸하며 가출하고는 영혼의 자유를 찾아 전국을 떠돌며 방황하는 내용 정도만 겨우 기억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마지막 장면은 가끔 뜬금없이 떠오르곤 한다. 젊은 주인공이 알래스카의 자연 속에서 독초를 잘못 먹는 바람에 죽는다는 설정이 실화(True story)라는 것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보다는 '길들지 않은 삶'을 본 충격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철저하게 길들여진 삶을 살았다는 자각이었다. 개의 조상은 늑대라고 한다. 늑대가 인간이 사는 곳을 얼씬거리며 인간이 남긴 음식을 주어먹다가 길들여져 개가 되었다. 늑대의 덤빌 듯 사나운 눈빛은 '야성(wild)'이고, 개의 아래로 내려 깐 겁먹은 듯한 눈초리는 '길들여진(tame)' 그것이다. 영혼이 자유로운 늑대는 항상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배가 고프지만, 자유를 주인에게 저당 잡힌 개는 먹이를 굳이 찾지 않아도 된다.


인생의 대부분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대신시키는 일을 하며 길들여진 채로 살았다. 학생 때도 사회에서도. 지금은 모교의 교수로 있는 친구는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시대에 저항운동을 했다. 정부나 사회, 학교가 원하는 대로 길들여진 나는 국가에 저항하는 그를 두려움과 질시의 눈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직장에서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했다. 검은돈을 만들었고 뇌물도 받았으며 불법도 자행했다. 참고 참다가 분에 못 이겨 폭발할 때도 없지 않았으나 후유증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20여 년 전 내가 택한 이민도 길들지 않겠다는 나름의 저항이었는지 모른다. 더 이상 사회나 회사가 요구하는 길들여진 삶에 지쳤을까, 아니면 너무 참아서 억눌렸던 야성(?)이 폭발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윗사람 눈치 보는 것도 힘든데, 아랫사람으로부터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것- 실제로 심각한 모함을 받았다 -에 저항하고 싶었고, 그 저항의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지도 모르겠다. 재산을 정리하면 몇 십만 불은 됐으니까. 하지만 이국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몇 차례 시도했던 지난날의 저항도 그곳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부당한 일에 흥분하면 그러지 않아도 짧은 영어가 더 짧아졌다. 다행인 것은 그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한국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천동설에 저항했기에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생각할 수 있었다. 동쪽으로 항해하지 않고도 인도에 갈 수 있다는 발상 때문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고, 교회가 가르치는 창조론을 부정한 다윈은 진화론을 세계에 알렸다. 스티브 잡스가 위대한 것도 그의 인간성 때문이 아니라, 관습에 길들여지지 않아서 가능했던 그의 창의성 때문이다. 넥타이와 정장을 거부하고 터틀넥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청중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길들여진 국민은 일본이다. 어디나 깨끗하고 누구나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길들여진 국민은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전범국이 되었다. 독일도 비슷하다. 통치자에 저항하는 사람이 적었기에 세계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 또 그랬기에 전쟁의 폐허에서 부흥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와 올레길을 걸으며 대화하다가 이런 진리(?)를 발견하고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짐승을 길들이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폭력이 있다. 서커스에서 곡예를 하는 코끼리에게 전기충격을 준다고 한다. 군대에서 사람을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도 바로 폭력이다. 북한에서 주민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독재자가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회주의로 인민의 생각을 제한하고 사상을 억누르는 중국에서 세상을 변화하는 창의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유신시대 한국이 그랬었다. 창의의 씨앗은 야성이기 때문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는 통했을지 몰라도,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같은 독일계라는 것, 애국을 내세운다는 것,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 인종 우월주의자라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일에 비해 미국은 너무 와일드하다. 'wild wild west'인 캘리포니아도 있다.


광화문 촛불행진이 넉 달째 이어지고 있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의 저항이다. 반대로 시청 앞에서는 태극기 집회라는 이름으로 60대 이상이 모인다고 한다. 철저하게 길들여진 사람들의 저항이다. 자유당 시절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지 못했고, 유신독재와 군사 철권통치에 오랜 시간 동안 길들여진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야성이 고장 나 있다. 자유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탓이다. 사상의 자유를 경험한 적이 없는 요즘의 중국인들과 차이가 없다. 


평생 길들여진 채 살았던 나는 똑같은 잘못을 아이들에게 저지르고야 말았다. 아이들을 내 뜻대로 길들이려고 시도한 것이다. 서커스단의 코끼리를 길들이듯 폭력을 행사하는 잘못도 저질렀다.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 스스로 길들여진 인간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우쳤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세월에서 오는 걸까, 사고(思考)에서 오는 걸까. 아니면 은퇴의 여유로움에서 오는지도 모르겠다.


<사족>

어제는 '디지텍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일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교장이 강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종업식을 하면서, 박 대통령 탄핵의 부당성을 훈시했다고 합니다. 듣고 있던 아이들이 교장의 부당성에 항의했다는 것을 듣고, 10년 전 비행기에서 본 영화 '인투 더 와일드'를 떠올렸습니다. 교장의 훈시를 운동장에서 열과 오를 맞춰 부동자세로 들었던 우리와는 달리 요즘의 아이들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만큼 자유로운 생각과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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