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부정적 복지정책
(문제)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절기는?
➀춘분 ➁하지 ➂추분 ➃동지
정권 말기라 그런지는 몰라도 작년부터 전해지는 부정부패와 탄핵을 초래한 국정농단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운호 게이트’에서 출발한 홍만표, 최유정 변호사의 법조비리, ‘대우해양조선’의 남상태 전 사장과 이명박 정부의 결탁, 여고생과 담당 선도 경찰관의 성관계와 경찰 조직의 묵인, 고등학생들의 중학생 집단 강간, 유명 연예인 박유천의 화장실 강간 등 초엽기적인 사건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더니 결국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초유의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에서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만한 이슈들이고, 처벌 수위도 중형에 처해질 것이 틀림없다.
위 문제는 중학교 입시준비를 하던 국민학교 시절, 자연시험에 나왔던 문제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비교적 쉬운 문제라 생각해서 어렵지 않게 답을 골랐지만 쉽게 틀렸다. 한국에 살면서 각종 뉴스를 접하고 한국의 부조리나 부정부패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할 때마다 이 문제가 겹쳐진다. 억지논리를 펴서 이 문제와 작금의 한국에서 보는 부조리를 연관시켜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험을 봤을까? 중간고사, 기말고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입시, 1차에 떨어지고 2차나 재수, 입사시험, 승진시험, 영어시험, 면허시험, 자격증 시험을 포함하면 수 백 번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가장 최근에 본 실기시험은 몇 년 전 한국에서 유치원 차량 운전을 하느라고 본 ‘보통 1종 면허시험’이 있고, 필기시험으로는 뉴저지 면허를 캘리포니아 면허로 바꾸느라고 치른 7년 전의 면허시험이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시험을 또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시험이라면 웬만큼 자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면허 필기시험은 시험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안내책자(Driver Handbook)를 잠깐 보고 겨우 합격선 커트라인을 통과했다. 내가 본 최초의 자동차 면허시험은 1983년 봄 플로리다 멜버른(Melbourne)에서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면허시험에 긴장했던 탓에 핸드북을 가져가 밤새 달달 외웠고 쓸데없이(?) 만 점을 받았다. 시험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이랬다. ‘무슨 놈의 시험이 이렇게 쉽지!’
그때 만해도 운전면허는 한국에서 직업을 뜻했고, 한동안 운전면허시험은 국가고시(?)로 통했다. 차이는 분명했다. 미국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만 확인하고 붙여주자는 게 시험의 목적이었다면,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떨어뜨리려고 낸 문제였다. 출제의 목적이 다르니 문제의 난이도 역시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해마다 바뀌는 벌금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위반하면 벌금이 있는지 없는지, 벌점이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틀리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벌금이나 벌점이 얼마인지를 숫자를 묻는 문제를 내는 것이 좋다.
아주 간단한 문제 같지만, 위 문제에는 함정이 있다. 만약 ➂번 추분이라고 선택했다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정답은 ➁번이다. 낮이 밤보다 짧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추분이고, 낮이 짧아지기 시작하는 것은 하지다. 그러나 우기려고 대들면 이 문제에는 답이 없다. 실제로 낮이 짧아지는 것은 하지 다음날부터다. 하지 당일까지는 낮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어린 국민학생에게도 이 문제는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젠장, 이게 국어 문제지, 자연 문제야’ 하는 반발심이 생겼던 것이다. ‘아닌 것’을 고르라는 문제를 잘못 읽고 ‘맞는 것’을 선택하는 바람에 틀렸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아이들이 가져오는 문제지를 보면 아닌 것을 고르라는 문제에는 ‘NOT’이라는 단어가 따옴표 속의 굵은 고딕체로 되어 있었다. 질문의 요점을 헷갈리지 말라는 주의다. 즉, 질문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SAT를 준비할 때 시험문제를 보면 정말 쉬워 보였다. 특히 수학이 그랬다. 한국이라면 중학생도 맞출 수 있는 문제도 여럿 보였다.
한국의 수능시험은 해마다 문제가 된다. 답이 없다거나, 다른 답도 있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렵게 내려고 문제를 비비 꼬았으면 대학 교수들이 출제해도 그런 문제가 생길까. 몇 년 전에는 영어시험의 어떤 문제를 얼마나 어렵게 냈던지, 미국의 명문대 신입생들에게 풀게 시켰더니 맞춘 사람이 50% 미만이라고 했다. 나는 그 문제가 뭘 질문하는지 뜻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식을 측정하겠다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 한국에서는 지식보다는 시험 치르는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요즘은 아이들 키우는 방식이 우리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지 마’, ‘시끄러’, ‘안 돼’ 등의 부정적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 부정적인 언어의 사용은 부정적인 사고를 주입해서 창의적 사고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인생관을 심어준다는 논리는 그럴듯하다. 그런 이론이라면 자나 깨나 시험이라는 이벤트에 매여 사는 아이들에게, ‘제발 틀려다오’하는 식의 문제들은 어떤 작용을 할지를 같은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최근 한국에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 중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시간을 전업주부냐 아니냐에 따라 다르게 하겠다는 정책이 있다. 아이 엄마가 전업주부라면 6시간만 허용되고 직업이 있다면 종일반에 둘 수 있다는 거다. 아이를 맡기는 비용이 가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주어지는 복지정책의 일환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정책의 목적은 혜택을 덜 주자는 것이다. 복지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지 않을 구실을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처럼 아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든 말든, 전업주부든 아니든, 부자든 가난하든, ‘양육수당(Child Support)’이라는 명목으로 일괄적으로 가정에 주는 것이 아니라 보조금을 어린이집에 주고, 그것마저도 또 구실을 찾아서 적게 주려는 것이다. 부정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정책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송파구에서 발생한 ‘세 모녀 자살사건’도 그런 정책의 부작용이었다. 인간의 최소생계를 위한 기초수급마저도 젊은 자녀가 있으면 안 되고, 장애인이라도 여러 등급을 매겨 차별하고, 임대주택도 입주조건이 까다로워 병든 아버지가 죽어도 쫓겨날까 봐 사망신고도 못하고 지내기도 한다. 일괄복지를 주장하면 이건희에게도 주어야 하느냐고 따진다. 이유만 있으면, 핑계만 있으면 안 주겠다는 발상인데, 그건 복지를 하겠다는 태도가 아니다.
1%들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껌값’에 불과할지 몰라도 50%에 가까운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을까? 주지 않아도 될 1%의 돈 때문에, 90%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피해가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발상일까? 혹 그것은 ‘틀리기를 목적으로 출제되는’ 문제에 길들여진 경향 탓은 아닐까?
OECD 최고의 노인 빈곤율, 최고의 자살률, 이혼율, 최소의 복지 등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부정적인 시험문제와 관계가 전혀 없다고 자신할 수는 없을 듯하다.
▼ 이런 통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 한국사회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예다. 왼쪽은 사전심의에 걸린 포스터고 오른쪽은 검열에 통과된 것이다. 위 포스터는 스커트 길이가 문제가 되었고, 아래는 키스하는 장면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유신시대의 일이 아니다. 불과 2년 전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성폭력이 없어졌다면 문제 삼지 않아야겠지만, 최근 뉴스에 나오는 사건은 무엇을 뜻할까.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내에 수백 장의 포르노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 인터넷 세상에, 어떻게 하든 트집을 잡아내려는 이런 경직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정부에 얼마나 많을까 걱정이 된다.
▼ 평균적인 한국사람은 정부나 국회를 처음 보는 낯선 사람보다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 해마다 늘어나는 노인들의 자살은 한국의 복지 현주소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