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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Feb 27. 2017

'Better Life'를 찾아서(2)

이민 이야기

- 한국에서는 일 잘하는 사람이나 못하는 사람이나 봉급이 같잖아. 8시간만 일하고 땡 하고 가는 사람이나 12시간씩 일하면서 회사에 크게 기여하는 사람이나 차이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불공정한 것 아냐? 월급은 입사한 순서에 따라 호봉으로 결정되고 사람마다 다른 능력은 철저히 무시된다면 절대로 공정한 것은 아니지.


직장에서 알게 되어 친하게 된 K군이 한 말이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겪었던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당시 그 회사에서는 그랬다. 그가 한국을 떠난 이유다. 그는 나보다 한 해 늦게 미국 연수를 다녀온 후, 1년을 준비해서 1986년 8월 서른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NJIT(NJ Institute of Technology)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으나 주립대학에서는 조기졸업 수단이 없자, 뉴저지 호보컨(Hoboken)에 있는 사립 명문대로 옮겨서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 끝에 1년 3개월 만에 컴퓨터 사이언스 석사 과정을 마쳤다.


- 나는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이나 섹스보다도 프로그래밍하고 디버깅(프로그램에서 발생하는 에러를 수정하는 일) 하는 게 더 재밌어. 컴퓨터는 논리잖아. 내가 설계해서 만든 대로 동작하고 결과를 보여주면 그렇게 희열을 느낄 수가 없거든.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노트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사는 그에게, 그게 그렇게 재밌느냐? 고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소파에 앉자마자 외투도 벗기 전에, 가방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서 전원부터 켜는 사람이었다. 새로 산 그의 노트북 컴퓨터는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자판을 하도 두드려 대는 탓에 글자는 지워져 보이지 않게 된 지 이미 몇 개월째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당연한 결과로 그는 크게 성공했다. 졸업한 뒤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거쳐 1992년에 창업한 그의 회사는 초창기의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는 1997년에 백만 불, 1998년에 3백만 불, 1999년에는 천만 불의 매출을 달성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인건비와 사무실 비용 외에는 원가가 거의 들지 않는 사업이다.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2010년 회사를 팔아 수천만 불을 챙길 수 있었으니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 2004년 50살이 다 되어 시작한 골프도 특유의 열정과 집중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싱글의 경지에 들어섰다. 그는 운동에 소질이 전혀 없는 부류이었는데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골프광이기도 한 그는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캐나다 서북부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를 겸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골프도 마음만 먹는다면 매일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시간이 없어 못한다.


그 회사의 직원으로 혹은 친구로서 장시간 그를 지켜보며 느낀 것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회사가 별로 좋지 않을 상황에서도 무슨 단체에서 주는 '경영자 상'을 받는 것에 흥분하고 자랑했다. 자신의 모교에서 주는 '자랑스러운 동문인상'을 받으러 한국까지 다녀오는 것을 보며, '아, 저 친구가 이제는 명예를 생각하는구나!'라고 느꼈다. 항상 겸손하고 일 밖에 모르던 그가 어느 순간부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남을 설득하려 들었고, 상 받는 일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때 받은 '경영자 상'이 회사를 팔고 만 지금도 의미가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바로 윗동서의 누님인 K여사는 내겐 사돈이지만, 오렌지카운티 ‘부에나 팍’에 살기 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오래전에 이민 와서는 미국 사회를 알기 위해, 한 달 만에 운동화 한 켤레가 다 닳아빠질 정도로 걸어서 돌아다녔다. 비즈니스를 셋업 해서 얼마간 운영하다 되파는 일과 오래된 집을 사서 리노베이션 해서 되파는 일로 돈을 벌었다. 지금도 비어있는 가게를 보면 어떤 비즈니스가 이곳에 될지 연구한다고 들었다.


LA 주변에 부동산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어, 세만 받아도 월 만 불이 넘는다고 하니 어떤 의미의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분이다. 아직 미혼인 아들과 단둘이 사는 플러튼의 넓은 집에서 강아지만 4~5 마리를 키운다. 젊어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병으로 장기의 일부를 들어낸 탓에 소변이 조절이 되지 않아 기저귀를 사용한다. 낮에는 괜찮지만 밤에는 흘러내려 고인 소변이 식는 바람에 자다가 추워서 떨기도 한다.


렌트를 제때 안 내는 테넌트들을 수금하러 찾아다니는 일과, 맛있는 음식 사 먹으러 다니는 것이 소일거리다. 유일한 취미는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몇 천불(때로는 몇 만불) 잃고 오는 것이다. 물론 아주 가끔 딸 때도 있다, 남아있는 관심사로는 늦기 전에 가진 재산을 정리해서 유일한 혈육인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항공사에 다니는 아들은 엄마가 갑자기 사망하면 어떤 재산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빨리 정리해 달라고 재촉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수 백 편의 영화를 카피해서 TV로 볼 수 있게 해 준 내게 무척 고마워했다.


우연히 만난 LA 지역의 대학 동문회 모임은 정말 돈독했다. 1기 선배부터 사십몇 기 후배까지, 매월 골프모임, 등산모임, 친목모임이 있었고, 봄에는 야유회, 연말에는 망년회를 했다. 동문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간이 짧아 많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에어컨 일 하는 후배를 따라다닐 때 이야기를 들었다.


- B 선배님은 몰몬교 신자이신데, 태어나서 술 담배를 한 번도 입에 대신 적도 없데요. 전원장치를 만드는 회사에서 65세에 정년을 하셨는데, 회사에서 다시 나와 달라고 했답니다. QA(품질관리) 전문가로 워낙 기술이 뛰어나신 분이 관두니까 그 공백이 컸나 봅니다. 지금 연세가 70인데도 현역으로 일하시고, 동문회 등산모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웬만하면 사모님과 함께 참석합니다.


2010년 7월 처음 참석한 등산모임은 Azusa 쪽의 무슨 산이었는데, 산을 넘어 계곡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되돌아오는 코스였다. 이른 아침의 선선한 시간에 시작한 산행은 힘든 줄 몰랐으나, 되돌아오는 길은 그늘이라고는 하나 없이 캘리포니아의 한여름 내려쬐는 뙤약볕 아래 걷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점심식사와 함께 마신 소주의 영향도 컸겠으나 걷는 데는 웬만큼 자신 있는 내게도 보통 힘들지 않았다.


- 이 사람들아, 다시는 Azusa 쪽에 오지 마. 내 이럴 줄 알았어. 마누라 데려오지 않은 게 다행이지. 이게 사람 죽이는 거지, 등산을 했으면 하산만 하던가, 그늘 하나 없는 곳을 오르락내리락하려니 얼마나 힘들어! 아이고 힘들다.


미리 내려와서 화장실 옆 그늘에 - 그만큼 그늘을 찾을 수가 없었다. - 쓰러져 쉬고 있던 내게, 13년이나 위인 선배님의 불평은 불평이 아닌 경악처럼 들렸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과연 저렇게 지낼 수 있을까?


<후기>

사람들은 각자 다른 수많은 사연들을 지니고 삽니다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대체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Better Life', 다시 말하자면 미국 헌법에 인간의 권리라고 명시한 '행복추구(Pursuit of Happiness)'입니다. 그 '행복'을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이민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제적 부(富)를 행복추구와 더 나은 삶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여깁니다. 돈이 목적과 수단이 되는 삶입니다. 하기야 돈 버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미국에서 그런 재미로 사시는 교민 분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이미 ‘어떤 노인의 죽음’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오로지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살다가 갑자기 하룻밤에 세상을 떠난 분도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Better Life’를 찾았다고 생각할까요?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고도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것을 찾습니다. 명예에 집착하고 권력에 욕심을 내면서 불행한 최후를 맞기도 합니다. 이미 충분히 가졌는데도 더 많은 부를 원하기도 합니다. 정주영 씨가 대통령에 도전하고, 그 자식들이 소위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삼성의 이건희 씨가 형과 누나들로부터 고소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건강을 잃은 사람들은 'Better Life'를 위해서 돈보다도 건강이 최고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행복을 위한 조건도 사람마다 다르고 나이가 들면서 바뀌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健康), 처(妻, 와이프), 재(財, 약간의 재산), 사(事, 소일거리), 우(友, 친구)가 필요하다고 말에 공감이 가는 이유입니다.


다른 것은 다 갖추고도 병마와 싸우며 고통 속에서 지내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배우자와 갈등으로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힘들게 사시는 분도 있으며, 또 소일거리가 없어 답답해하며, 친구가 없어 외롭게 지내시는 분들도 있지요.


이민을 선택해서 떠날 때, 우리가 믿었고 찾고 있었던 'Better Life'는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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