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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Mar 06. 2017

'Better life'를 찾아서(4)

내가 경험한 이민

- 감히 누구 앞에서 땡깡이야, 기껏 과장이었던 주제에!


'더 나은 삶'을 찾는다는 것은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는 의미도 된다. 내가 그랬다. 다니던 회사의 사장이 바뀌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따라서 달라졌다. 권위적인 새 사장은 만나는 것도 힘들어 결재받는 일상 업무도 쉽지 않았지만, 찾아가서 운 좋게 조우하더라도 업무에 대해 자세히 보고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모회사에서 부사장으로 퇴직하고 낙하산을 타고 오신 높고 귀하신 어른은, 모회사에서 기껏 과장으로 있다가 – 과장이라는 하찮은 신분으로는 하늘 같이 높은 부사장을 업무상 만날 일은 전혀 없다. 비서라면 몰라도. - 자회사로 옮겨서 겨우 부장 노릇을 하는 젊은 사람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려 하자 호통을 쳤다.


결재판을 들고 사장실을 나서며 암담하고 처량한 마음이 되었다. 과장 하나, 대리 둘이 전 직원인 부서를 맡아 지난 3년 동안을 물불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 덕분인지 행운 탓인지는 몰라도 3년 만에 30명이 넘는 부서가 되었고, 매출도 회사 내에서 탑 3에 들었다. 출범한 지 5년이 안 된 회사에서 어느 부서보다도 장밋빛이었고 촉망받는 부서이었다.


부서의 담당업무가 점점 커지고 이런저런 권한이 생기자 끊임없이 청탁과 압력이 들어와 머리가 아프고 괴롭던 시절이었다. 회사에서 인정하지 않지만 영업에 필수적인 비자금을 스스로 만들어 뇌물도 주고 고급술집에도 드나들어야 일이 돌아가던 때였으니까, 걸리지만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 불법(?)도 자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었다. 묵살하고 거절하는 청탁도 있었지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분으로부터의 부탁도 더러 있었다. 묵살하면 온갖 더러운 소문이 돌았고, 들어주다 보면 그게 불거져 크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장이란 직책은 임직원이 회사에 충성하기 위해 정당하게 일할 수 있도록 뒤를 받쳐 주어야 하는데, 사장이 자신의 권위만 생각하고 부하직원의 안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이 많아졌고, 날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꿨다.


- 이 회사에 나갈 사람이 많아. 하지만 당신은 아냐!


이민을 가기 위해 사표를 냈을 때 사장실에 불려 가서 사장으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내 결정은 옳았다.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아 한국은 외환위기로 나라가 망할 것처럼 시끄러웠다. 용어도 생소한 디폴트, IMF, 구제 금융과 같은 경제적 용어가 노상 매스컴을 탔고, 800원에도 못 미치던 환율은 순식간에 1,600원을 넘었다. 2억을 넘게 받고 팔았던 분당의 아파트는 1억 3~4천으로 떨어졌다. 미국이라는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많이 위축되고 자존심이 망가지는 경험을 했지만, 그런대로 정착했고 살만 했다. 한국에서 평생 중고차만 사용하던 내가 생전 처음으로 미국에서 새 차를 장만했다. 추수 감사절에는 그렇게 마련한 혼다 오디세이로 1,200 마일 운전해서 플로리다 올랜도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십수 년 전 스스로에게 했던 약속의 실천이었다.


1983년 처음 갔던 미국에서 동료와 함께 주말을 이용하여 올랜도 디즈니 월드에 갔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창피함을 느꼈다. 젊은 연인들이거나 아이들과 함께 가족단위로 온 백인들 사이에 동양인 남자 셋은 참 어색했다. 나중에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면 아이들에게 이곳을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던 약속이었다.


- 장 부장, 자네 잘 갔어. 여기는 개판이야. 이상한 놈이 사장으로 와서 개판 만들어 놨어. 대통령 끄나풀과 줄이 있는 놈인데, 처먹는 것 밖에 몰라. 해외출장을 가는 사장에게 다들 봉투를 갖다 주는 거야. 난 안 갔거든. 그런데 영 찜찜한 거야. 결국 하루 전날, 봉투를 넣고 찾아가 주었는데 뭐라는 줄 알아. 내가 마지막으로 왔다는 거야. 그냥 놓고 나가라는 거야, 하하하. 뭐 이런 개자식이 다 있어! 이 나이까지 살면서 나는 듣도 보도 못했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처음 방문했던 한국에서 ㅂ부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영부인 사촌오빠의 처조카가 사장으로 왔다는데, 그의 악행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촌오빠는 정권 말기에 뇌물수수로 구속되었다.)


이민 가지 않고 그 회사에 계속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 아! 그래, 나는 ‘Better Life’를 제대로 찾은 셈이구나. 이곳에 그냥 있었다면 그런 놈하고 치고받고 싸우고 나갔을 거야.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내 성격에.


<후기>

인간을 수학으로 표현하면 ‘y = f(t)·f(E)’가 아닐까요. 즉, 변수인 시간(t)과 환경(E)의 함수라는 겁니다. 시간과 처한 환경에 따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생각이 바뀌는 존재입니다. 한순간도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강물에 인간의 마음을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때는 조폭 두목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군 복무 중일 때, 최전방에서 10·26과 12·12 사태를 맞이했는데, 당시 전방에서 유일한 읽을거리였던 전우신문에는 온통 그의 찬양 기사뿐이었습니다. 당연히 광주사태도 빨갱이 김대중이 간첩들과 연계해서 일으켰다고 이해했었습니다. 무지한 사람이란 그런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은 가르쳐주는 대로 머리에 입력합니다.  하하하.


MB가 대통령이 된 것에도 많이 흡족했습니다. '맞아,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사람이 되어야 배고프고 힘없는 백성을 위할 줄 알 거야. 한일협정에 반대해 감옥에도 갔던 사람이니 무엇이 올바른 지도 알 거야.' 하면서. 또 당시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즐겨 읽던 조선이나 중앙일보에는 온통 그의 찬양 기사 일색이었습니다. 2008년 한국에서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로 촛불집회를 할 때도 MB의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아 측은한 생각까지 했습니다.


처음 제주에 왔을 때도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해군기지 문제는 왜 반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성당에서 반대하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을 때도 '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진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바뀝니다. 그리고 뉴스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전해지는 뉴스에는 작위 된 진실만이 전해집니다. 가진 자나 기득권이 어리석은 대중의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 각색하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력과 돈이 있으니까요. MB와 박근혜 정부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습니다.


세 차례나 총리를 역임한 이탈리아의 전 총리 ‘베를루스코니’가 사용한 방법이 그랬다고 합니다. 주요 TV 방송과 언론을 틀어쥐고 대중에게 왜곡된 정보만 전달했던 거지요. 말도 안 되는 인종주의자에, 탐욕과 호색 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이 장시간 정권을 유지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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