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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Mar 16. 2017

운동과 봄

한국에 살고 있다고 해서 미국 생각이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저분한 주변 환경을 볼 때나 시끄러운 소음에는 깨끗한 자연을 가진 미국이나 뉴질랜드가 그리워진다. 주변에 건물 짓는 일이 끝났는지 요즘은 망치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위층에서 리노베이션을 하는지 날카로운 금속성의 전기톱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항의를 했다. 그런 소음을 내려면 미리 알려줘야 도서관으로 피신을 가던지 할 것 아니냐, 시끄러워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언제 끝나는 작업이냐? 고 따졌다.


다음날 아침에 위층 남편이 찾아와서 미안하다며 찜질방에라도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봉투를 놓고 갔다. 집사람을 시켜 억지로 돌려주고 말았지만,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행태를 이해하기 힘들다. 여차 저차 해서 언제까지 시끄러울 테니 알고 있으라고 사전에 말해주었다면 기분 상할 일은 아니다. 누구나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면 기분이 나빠진다.


미국에 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컬데섹(Cul-de-sac, 막다른 길) 맞은편 집에 사는 50대 후반 이태리인 프레드가 메탈릭이었는데 가끔 주말에도 사고 난 차를 갖고 와서 찌그러진 차체를 펴는 작업을 했다. 그라인더로 금속을 갈아대는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는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랬을까. 처음 그 집에 이사해서 이웃이 되었을 때, 프레드는 우리 식구를 초대해서 집에서 만든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집에서 담근 포도주와 토마토소스를 주며 친근한 척했다. 그러면서 먼저 살았던 사람들 흉을 보았다. 같은 이태리 사람인데도 험담한 것으로, 소음 문제로 다투었으리라는 것을 훨씬 나중에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사람들 사는 이야기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차이가 없다. 그런 정도의 소란마저도 피하고 싶다면, 산속에 들어가 자연인의 삶을 사는 수밖에.


한국에 살면 미국의 좋은 점만 기억난다. 계곡에 스티로폼이나 비닐이 굴러다니고, 퉁탕거리는 소음과 지저분한 공사장 주변 모습이 그렇게 만든다. 그럴 때면 굳이 미국에서 나빴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미국에서는 소음이 없었나! 병원을 생각해봐! 예약을 하고 가도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게 예사였잖아. 빌어먹을, 뭐 하러 예약하는지 몰라. 여기서는 예약 없이 아무 때나 가도 30분 이상 기다린 적이 없는데. 또 공원이 좋으면 뭐해, 꼭 차를 타고 가야 하잖아. 주위에는 운동할 때도 마땅찮고. 그리고 젠장할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지? 그런 마음으로 미국 생각을 접는다.


제주 날씨가 이상하다. 보통이라면 요즘은 날씨 좋을 때가 아니다. 해를 보는 날이 많아야 일주일에 하루 정도라야 한다. 그런데 금년에는 계속 쾌청하다. 덕분에 일주일 계속 새벽 조깅을 이어갔다. 일주일에 5일이 목표지만 비도 바람도 없는 날이 이어지니까 일부러 쉴 필요는 없다. 걸어서 5분에서 10분 거리에 학교가 셋이나 있다. 고등학교가 둘에 초등학교가 하나다. 미국이라면 불가능한 조건이다. 고등학교는 거의 매일 축구부의 새벽 연습과 조기축구가 있어서 초등학교를 주로 이용한다.


초등학교라도 운동장에는 짙은 주황색의 우레탄 트랙이 깔려있어서 달리기에는 그만이다. 20바퀴에서 25바퀴로 늘린 이후에 마지막 다섯 바퀴가 무척 힘들다. 숨은 턱에 걸리고 이마에는 찐득한 땀이 흐른다. 일주일 쉼 없이 뛰어서 그럴까. 왼쪽 장딴지에 통증이 온다. 어제는 약하게 왔는데 오늘은 심해졌으나 참을 만하다. 


집에서 학교까지 600미터를 뛰어가서 25바퀴를 도는 것이니 5.6킬로를 뛰는 셈으로 45분이 걸린다. 이렇게 뛰고 나서 샤워하면 하루는 온전하게 내 것이 된다. 글을 쓰던, 책을 읽던, TV를 보던 죄책감 없이 나머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예순둘이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나쁜 편은 아니다.


이렇게 운동에 목을 매는 건, 물론 건강 때문이다. 오래 살고픈 마음은 없으나 사는 날까지 치매나 뇌졸중 같은 병에서는 자유롭고 싶다. 게다가 부모님은 장수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으니 그런 유전자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암이나 죽음은 무섭지 않다. 그러나 치매와 뇌졸중은 정말 두렵다. 


그래서 새벽에 운동화만 걸치고는 컴컴한 운동장을 유령처럼 돌고 또 돈다. 비만 오지 않고, 태풍 같은 바람만 없다면, 추워도 더워도. 한국에 사는 이점이다. 천성이 게을러 차를 타고 체육관에 간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날이 많이 길어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어둠이 걷힌다. 오늘은 겨우내 체온을 지켜주었던 내복도 벗어던지고 전기장판도 침대에서 꺼내야겠다. 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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