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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Mar 20. 2017

부자 친구네 집

70년대 초, 고교시절의 이야기다.


1차 시험에 낙방하고 2차로 하향 지원해서 들어간 신촌 근처의 고등학교에서의 성적은 2, 3류 학교라 그런지 나쁘지 않았다. 반에서는 거의 1, 2 등을 했고, 3등 이하로 떨어지면,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당시 그 학교에서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고 난 후에, 교사 건물 입구에 1등부터 600등까지 명단을 걸어놓고는 했었는데, 항상 처음 열 명 안에 내 이름이 있었다.


3학년 때는 학교 근처의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학교가 끝나면 버스 타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는 커다란 도시락을 두 개 들고 학교 근처 독서실로 다시 와서 공부하다가 새벽 한 두시에 빈 의자를 모아놓고 댓 시간 잠을 자고 학교에 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에 내 뒷자리의 친구가 자기 집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그의 집이 부자인 것은 도시락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는 학교 선생들로부터 국·영·수 과외까지 받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같이 가서 자기 엄마에게 가서 말씀을 드리고 허락을 받아, 자기 집에서 같이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매일 버스 타고 신촌에서 용산에 있는 집까지 왔다 갔다 하느라고 허비되는 시간이 아까운 터였다. 그의 집은 학교에서 몇 정거장에 불과한 연희동이었다.


연희동의 오르막 막다른 길에 있는 그의 집은 생각보다 훨씬 으리으리했다. 하얀색의 그림 같은 2층 집의 위용은 나 같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고,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르는 길을 각종 정원수와 보기 좋은 돌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잘 다려진 한복을 곱게 입은 친구의 모친은, 한 눈에도 품위가 넘치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친구는 자기 엄마에게 내가 전교에서 일이 등을 다투는 모범생이라고 과한 칭찬을 하는 동안, 오륙 등은 몰라도 그런 적이 거의 없는 나는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어쨌든 친구 엄마의 허락은 떨어졌고, 며칠 뒤부터 나는 팔자에 없는 호강을 하게 되었다. 내 도시락 반찬은 시어터진 김치 나부랭이에서 계란이나 소고기 장조림 같은 고급 반찬으로 바뀌었다. 점심시간에 군내 나는 내 도시락에 얼씬도 안 하던 놈들이 내 도시락을 기웃대는 보기 힘든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집에서 막내인 친구는 공부방이 따로 있었고, 군 복무로 비어있는 친구의 형이 쓰던 큰 방이 내게 주어졌다. - 그 방의 선반 구석에 꽂혀있던 플레이보이 잡지를 발견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들쳐보던 기억이 지금도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중간에서 직각으로 꺾이며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 피아노가 있었다. 친구는 아침식사하러 내려오다가 거기에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때로는 내게 신청곡을 묻기도 했고, 나는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주문했다.


계단 옆에는 곳곳에 도자기 같은 골동품이 놓였고, 계단과 거실에는 육중한 분위기의 카펫이 깔려있었다. 친구의 부친은 식사 전에 잠깐씩 마당에서 골프 스윙을 연습했다. 자가용 승용차가 두 대 있어서 한 대는 항상 집에서 대기했다. 친구의 모친을 하얀 한복을 즐겨 입으셨는데,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갈 때도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듯했다. 자가용 운전수가 차를 대기시키느냐고 물어도 괜찮다고만 대답했다.


나는 3개월을 채 못 버티고, 그 집에서 스스로 나왔다. 늦은 밤에 친구 어머님이 과일 같은 간식을 들고 오시곤 했다. 그런데 친구 녀석은 옆의 책상에서 졸고 있었다. 그런 장면을 들키게 되면 마치 내가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양, 어머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것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친구가 내게 거짓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야, 너 먼저 가. 그리고 나는 선생님이 붙잡아서 조금 늦는다고 엄마에게 말해 줄래!”


뻔한 거짓말을 시키는 일이 반복되는 통에 어머님에게 거짓을 말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고, 하루가 좌불안석 같았다. 결국 어머님께 이실직고를 하고는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그 집을 나왔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친구 어머님의 훌륭한 모습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웃음이 별로 없으신 표정이었고, 항상 정숙하고 품위가 있던 중년 부인이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내가 그 아이가 그런 걸 왜 모르겠니? 다 짐작하고 있지. 그래도 너만 좋다면 이 집에 있으면서 대학에 갈 때까지 공부해도 돼. 그러나 남의 집이니 불편하겠지? 그러니 내가 잡지는 못하겠다.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라. 너 같이 착실한 사람은 그렇게 될 거야.”


그 집에서 아침에는 온 식구가 식탁에 앉았다. 가정부가 차려놓은 식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어서 처음 보는 음식도 많았으나 항상 조심스러웠다. 너무 많이 먹거나 혹은 한 가지 맛있는 음식만 먹으면, 품위가 없어 보일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배가 부르지 않고 더 먹고 싶어도 숟가락을 놓았다. 내게 허락된 공간에서만 - 누가 말해준 것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 그렇게 느꼈으므로 - 움직였고, 다른 식구들의 눈에 띄면 괜히 잘못 처신한 듯 민망한 느낌이 들었다.


학교가 끝나서 친구네지만 부잣집으로 돌아갈 때는 뿌듯했다. 그러나 막상 그 집에 들어서면, 위축되고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저녁에 씻고 혼자 책상에 앉으면, 가정부 아주머니가 간식과 주스를 들고 방문을 노크하곤 했다. 물론 친구 어머님이 시켰을 것이지만, 마치 그 집 아들이라도 된 듯한 부귀영화를 누렸다.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는 원망도 들었다.


그 집을 나와 다시 독서실로 돌아왔고, 다시 불편한 생활로 돌아간 대신 자유를 되찾았다. 친구 놈들과 어울리며 밤늦게 교복을 입은 채로 포장마차에서 소주도 마시고, 의자 위에서 잠들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기도 했다.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었고, 거리낌 없이 내 맘대로 행동해도 마음이 위축되거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4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느끼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마지못해 돌아온 한국이었다. 3년이나 5년 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몇 개월 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그동안 남의 집에 살았었구나! 수십 년 전, 친구네 그 부잣집에서 잠깐 지냈던 것처럼!

아, 그래서 그렇게 위축되고, 불편했구나! 내 집이 아니었기에!

아, 그래서 미국인들을 만나는 자리를 피해 다녔구나! 내 식구들이 아니었기에!

아, 그래서 이제는 마음이 편하고 모든 게 자연스럽구나! 태어나고 자랐던 내가 살던 내 집에 돌아왔기에!


비록, 못 살아도, 온통 냄새나는 곳이고,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더러운 곳이라도,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서로 헐뜯고 속고 속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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