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아니,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운명론을 무능력자의 한심한 변명이라고 비웃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 뿐이라고 했던가. 살면서 운명이라는 비과학적 요소로 해석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정리해고를 당한 뒤 점점 무능력자가 되면서 운명이라는 존재에 의지하고 싶어 졌다는 것이 솔직할 거다.
"장 과장, ○○○ 부에 대학 선배 C과장이 있는데 이민을 간다네. 아이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구한다는데 내가 자네를 만나보라고 했으니까,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업무관계로 중요한 분이거든. 부탁한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과장의 부탁 전화 한 통이, 잠복되어있던 이민병 바이러스를 활동하게 만든 동기였다. 찾아온 C과장의 부탁을 들어주며 어떻게 이민을 가게 되었는지, 뭘 하며 살 것인지, 궁금했던 것을 묻고 답하며 이민병이 다시 도졌다. 나보다 일찍 이민을 떠난 C과장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동료였던 과장은 처장까지 지내다가 은퇴했다.
이민생활에서 한 차례의 커다란 시련을 겪은 뒤,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장밋빛을 되찾아 갈 무렵, 금융위기가 왔으며 그 후유증으로 전혀 예상치 않았던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되돌아와 제주에 정착해서 7년째 살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제주는커녕 한국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것은,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제주의 어느 골목에 주저앉아 케이블 피복을 벗기며, 전자부품을 남의 집 수도계량기에 연결하고 있을 줄은.
한국으로 돌아와 제주에 살면서 이민자들을 위한 카페를 만든 것도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니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계획한 대로 이루어졌다면, 자발적 은퇴 후 지금쯤 오레건 주 어느 해변 마을이나 시골 변두리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인터넷 카페를 만든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통해 여러분들을 만난 것이나 카페 분들이 서로 연락하여 방문하고 캘리포니아나 뉴욕, 뉴저지에서 만난 것은 인연이다. 마찬가지로 LA에 사는 분이 제주를 방문해서 나를 만날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제주에서 성당 친구 P를 만난 것이 인연이었다면, 그를 통해 어린이집 운전을 했고 지금은 길바닥에서 케이블 작업을 하는 것은 무언지 모를 운명의 작용이다.
이처럼 운명과 인연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인지는 모르겠다. 닭과 달걀을 따지는 것과 같을지도. 물론 운명과 인연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정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당해 불행해진 사람들, 불치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운명이라는 단어보다 적합한 것은 없다. 평생 담배를 입에 대기는커녕 채식과 절식으로 일관한 법정스님의 입적은 폐암이 원인이었다. 오늘 오후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세월호의 사고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불법개조만이 아니라 공무원과 업자의 봐주기 및 부패, 국정원의 개입과 안전 불감증, 엉터리 선장 등을 모두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억지가 있다.
"아니, 그 양반이 암에 걸렸다고! 평소 그렇게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술담배는 일절 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암에 걸릴 수가 있지?" 이런 말 한두 번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술담배에 절어 살면서도 멀쩡한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억울하고 슬퍼서 견디기 힘든 일이다. 차라리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도 얼마든지 불행한 삶을 가질 수 있고, 대충대충 살았어도 누구보다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을 이해하는 방법이 바로 운명론이라면 굳이 부인하거나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랬기에 인생 선배들은 인생을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며 조소했다.
누구든지 백로의 모습으로 호수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싶지, 까마귀로 태어나 쓰레기를 뒤지거나 사체를 파먹으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백로나 까마귀가 되는 것은 운명의 힘이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다. '청산리 벽계수'가 수이 감을 자랑해서 안 될 이유는, 푸른 산, 맑은 계곡 물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의 힘이요, 자연의 힘이 바로 운명이다.
삶도 죽음도 자연의 일부이듯이, 행·불행도 삶의 부분일 뿐이다. 그러니 인생의 기나긴 여정에서 불행을 만나 힘들어하는 분들이여, 운명 탓으로 돌리고 편안해지시기를!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여,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고 잠시나마 미소를 지으시기를! 반대로, '운칠(運七)'이나 '운십(運十)'의 인연을 가진 분들이여, 운명에 감사함을 잊지 마시고 지금의 행복감에 취해 '운삼(運三)'이나 '운영(運零)'의 운명을 가진 분들을 잊지 마시기를!
<후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문재인의 부상을 보며 '운명'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습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2010년 유시민이 유고를 모아 '운명이다'라는 제목으로 노무현 사후 자서전을, 뒤이어 문재인은 2012년 대선 출마를 앞두고 '운명'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읽으며,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그 생각을 되살렸습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저지른 국정농단도 40년 전에 시작한 '운명과 인연'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문재인 대세론'도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박근혜 탄핵이 아니었다면 문재인 대세론은 없었을 테니까요. 20년 전 이회창 씨가 대통령에 낙선한 것도 하필이면 그때 IMF가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운명이었던 겁니다. 노무현 씨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이인제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대통령 같은 큰 인물만 운명이 작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도 운명은 작용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빌라를 20년 전에 지은 사람은, 완공 후에도 분양되지 않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리고 화병으로 일찍 죽었을 뿐만 아니라, 자금을 빌려준 친척도 암에 걸려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 15년 후에 집을 지었다면 대박을 터뜨렸겠지요.
미국행 비행기 값이나 보탤 요량으로 작년 가을에 했던 일을 다시 거드는 바람에 요즘은 글에 집중할 시간이 없습니다. 길바닥에 앉아 가느다란 케이블을 까서 연결하는 단순한 일을 합니다. 단순하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하루가 금방 지납니다. 오늘은 비가 오는 덕분에 팔다리를 쉬며 글을 씁니다.
30여 년 전 그날 C과장이 나를 찾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