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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카테리나 Sep 08. 2023

8화: 태양의 섬 파빅냐나

파빅냐나 최고의 절경 이름에 서린 유래

파빅냐나(Favignana)는 시칠리아의 서쪽 끝 도시 트라파니에서 16km쯤 떨어져 있는 섬이다. 섬에 딸린 또 하나의 섬인 셈이다. 마치 제주도에 속한 우도 같은 느낌이다. 휴양지로 인기 있는 관광지이며 모래 해변보다는 바위 해변이 주이고 물빛이 환상적인 곳이다. 섬은 대체로 평지라서 자전거를 빌려서 섬을 한 바퀴 돌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하기에도 좋은, 현지인들이 최고로 꼽는다는 해변이다. 영화 그랑 블루( Le Grand Bleu)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Cala Rossa Beach


4월의 파빅냐나 날씨는 좀 변덕스럽다.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고...

우리가 머무른 3박 4일 중 둘째 날 점심때쯤 되어 날씨가 좀 개었을 때 산타 카테리나(Santa Caterina)성을 향해 출발했다. 성은 이 섬 중앙에, 제일 높은 곳에 있다. 길은 포장이 잘되어 있었다. 처음엔 쉽게 올라갔다 올 수 있으려니 했다. 중간쯤부턴 갑자기 경사도가 급해지고 길도 좁아지고 돌길이 시작되었다. 조금씩 불던 바람은 심해졌다. 멀리 있던 시커먼 구름마저 가까이 오고 있어 불안해졌다. 같이 간 친구의 걸음이 빠르다. 역시 한 살이라도 젊으면 다르구나!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말은 무서워서 빨리 갔다는 것이었다)     


성의 해발고도가 314미터밖에 안 된다고 쉽게 본 것이 경솔했다. 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사도도, 바람도 심해지는 게 예사롭지 않다. 성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보이지만 올라가는 사람은 친구랑 나 둘뿐이다. 숨을 몰아쉬며 성 입구에 도달했다. 다행히 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우리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 뭔가 튀어나올까 봐 잔뜩 긴장을 하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오랫동안 버려진 흔적이 역력했다. 어두운 내부에는 창문을 통해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삭아서 구멍이 난 욕조가 한쪽 구석에 내박쳐져 있고, 부서진 창문, 벽에서 떨어져 나간 벽돌, 돌조각이 여기저기 뒹굴고 심란했지만 뭔가 탐험하는 기분도 들었다. 내부 공간은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테이크 아웃 맛집(가족이 운영) 'Scialae'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 감옥이라니     

원래 이 성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현지에서 생산되는 석회암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중세 초기에 아랍인들이 파빅냐나를 침략해 ‘산타 카테리나’라는 가장 높은 언덕 꼭대기에 성을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만인들이 섬을 점령하고 그곳에 다시 요새를 세웠다. 그 후 부르봉 왕가 통치 기간에는 감옥으로도 쓰였으며 한때 수감자가 32,000여 명에 이를 정도의 끔찍한 감옥이었다고 한다. 어쩐지 으스스하더라.     

Santa Caterina성

‘산타 카테리나’라는 이름은 노르만 왕조 때 성녀 Santa Caterina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작은 교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차 대전 중에는 적의 군함을 감시하는 관측소로 쓰였고 포병 부대가 주둔했다가 현재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쓸쓸하고 음산한 성이 되어 버렸다.     

 

성에 가게 된 계기는 꼭대기 테라스에서 사방이 360도로 보인다는 리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섬 전체가 대체로 평지인데 제일 높은 이 성에서는 섬전체가 보인다는 것이 내 발길을 끌었다. 계단을 찾아 올라갔다. 그런데 바람이 심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게 힘들 정도다. 사람마저 날려버릴 기세다. 마치 돌풍 같다. 루프탑까진 올라갈 수가 없다. 2층 테라스에 올라가니 전망 하나만큼은 죽여주는 곳이다. 성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비 날개처럼 펼쳐진 파빅냐나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테라스에서 보는 전망이 좋아서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어디론가 날려가 버릴 것만 같다. 루프탑에 올라가는 건 포기하고 날아가지 않도록 둘이서 손을 꼭 잡고 내려왔다. 1층으로 내려왔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바람이 약해졌다.     

Santa Caterina성에서 보는 전망-파빅냐나 섬의 서쪽 이 환히 내려다 보인다

셋째 날은 이 파빅냐나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아보고 싶은데 또 비가 온다. 수시로 밖을 내다보며 비가 그치기를 간절히 바랐다. 드디어 점심때쯤 하늘이 맑아져 점심으로 샌드위치, 마실 물, 카메라를 챙겨 길을 나섰다. 섬에는 저렴하게 자전거 대여를 해주는 곳이 많다(일반자전거 대여-종일 5유로) 우리는 숙소에 있는 자전거를 무료로 빌렸다.


Santa Caterina 성에서의 바람소리

한껏 기분이 들떴다. 여행지에서 자전거로 돌아보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만의 여유를 즐길 수도 있고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받는 기분도 좋다.

한 친구는 나랑 같이 타겠다고 했고, 다른 한 친구는 자전거를 못 타서 해안가를 걸으며 천천히 즐기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타서 그런지 처음엔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는데 타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나는 이제 익숙해졌다 싶었는데 친구는 타는 게 영 불안해 보였다. 탈 줄 아는 거 맞아? 몇 미터 가다가 멈춰서 돌아보고 조금 가다 또 돌아보기를 반복하며 1km쯤 지났을까?     


전날 내가 자전거를 탄다고 했을 때 친구도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했는데...

“언니 나 자전거 안 되겠어요. 숙소로 돌아갈게요”

“그래요. 가서 쉬어요. 나 혼자 타고 돌아보고 갈게요.”

“그런데 나 혼자 무서워서 숙소까지 못 가는데 언니가 같이 가주면 안 돼요?

“음...”

“그럽시다. 내가 앞장설게요. 조심해서 뒤따라와요.”     

“아 이제 중심 잡고 탈 수 있어요. 숙소 안 가도 될 거 같아요.”

“오케이, 가는 데까지 같이 가 봅시다.”     


바람이 뒤에서 불어주면 좋으련만 앞에서 불어온다. 페달을 밟는데 힘이 더 들어간다.

Cala San Nicola Beach

‘많이 못 가면 어때! 친구와 함께 가는 게 중요하지’

여러 번의 여행 경험으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함께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를 보면서 가까운 해변부터 갔다.  Cala San Nicola Beach 물빛이 엄청 투명하고 맑다. 바위 해변이라 물놀이할 수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다시 달려 ‘Cave caivallo’ 동굴 안에서 밖을 보는 풍경이 예쁘다. 동굴 밖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동굴 안에서 밖을 찍으면 아주 멋진 인생 사진이 된다.     


걸어서 다니겠다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났다. 깜짝 놀랐다. 그 친구는 산책 중에 현지인을 만나 승용차를 타고 안내받던 중이었다. 편하게 다니는 친구가 아주 잠시 부러웠다.

‘Cave caivallo’

여행 중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는 게 저런 것인가 보다,     


그 친구와 바로 헤어지고 자전거를 타고 다시 출발했다. 다음 장소인 Cala Rossa로 향했다. 구글맵에 뜨는 사진이 너무 아름다워서 꼭 가봐야 했다. 내가 앞서 가면서 종종 뒤를 돌아보며 친구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다. 바닷물은 청록색이고 바위는 다른 행성을 보는 듯한 풍경이다.


그런데 왜 이곳의 이름이 Cala Rossa일까? Rossa는 붉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파랗고 맑고 투명한 물에 왜 붉다는 의미의 이름이 붙었을까?     

2,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241년에 이 해안에서 두 세력의 피비린내 나는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200척의 배를 가진 로마와 그 두 배가 넘는 400척의 카르타고 함대 사이의 해전이다. 로마는 대규모의 카르타고군에게 기가 죽기는커녕 120척의 카르타고 선박을 침몰시키고 10,0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죽은 엄청 난 숫자의 페니키아인들이 파빅냐나의 북동쪽 해안으로 밀려왔고 그들의 피로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해서 Red Cove 또는 Cala Rossa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를 알고 나니 눈이 시리게 투명한 물빛에 가슴 한편이 아리게 다가온다.     


절경을 보려면 해변 쪽으로 울퉁불퉁한 길로 가야 하는데 끝은 낭떠러지라서 조심해야 한다. 아마도 파빅냐나의 절경 중 최고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숨 막히는 뷰를 보며 에스프레소든 맥주든 한잔하고 싶었지만, 비수기라 사람들도 가게도 없다. 오로지 아름다운 자연뿐이다.      

Bue Marino Beach

또다시 달린다. 길이 평탄하지 않다. 비포장도로는 좁고 군데군데 돌도 있고 패인 곳도 있어 울퉁불퉁하다. 자전거 초보가 다니기에 편안한 길은 아니다. 다행히 친구는 이제 그만 돌아가잔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다음 해변인 Bue Marino로 갔다. 역시 물빛은 이 세상 빛깔이 아닌 듯 신비롭다. 바닷물이 진한 청록색과 연한 파란색의 줄무늬가 있다. 해변은 낭떠러지였고 바위표면은 거칠어서 앉아 있으면 옷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햇빛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Cala Azzurra Beach
Cala Azzurra Beach Bar에서 목을 축이다

Bue Marino는 지중해몽크바다표범이 많이 살았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아쉽게도 지금은 멸종위기에 처해서 더 이상 귀여운 몽크바다표범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지도를 보니 약 2km 정도만 돌아가면 아름다운 또 하나의 해변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욕심이 나는데 친구가 걱정되었다. 친구는 가능하다고 했다. Cala Azzurra로 향했다. 노란 소국 같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처음으로 Bar가 보인다. 얼마나 반갑던지. 오늘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도는 동안 어디에서도 보지 못해 목이 타던 차였다. 집에 가야 할 걱정 따위는 날아가 버렸다. 마침 영업 중이었다. 친구는 주스 한잔, 나는 메시나(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통창이었다. 우린 서로 건배를 하며 오늘 투어를 자축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친구가 말했다. 언니가 안 보는 사이에도 수십 번도 더 넘어졌다고. 친구는 자전거를 마지막으로 타본 게 10년 전인지 15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난다고... 그것도 아주 편안하고 평탄한 호수공원에서만 타본 면허라고. 어쨌든 둘이 잘 마친 자전거 투어로 둘의 관계는 좀 더 끈끈해졌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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