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동 골목길 불빛을 따라가면, 책방 <사이에>
내 출근시간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 그래 봤자 10시 출근 7시 퇴근이지만 처음에는 아침시간이 여유롭다는 게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늦게 마치는 것은 생각 못하고 말이다. 마치 조삼모사에 나오는 한 치 앞을 못 보고 좋아하는 원숭이 같은 느낌인 것이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 식사를 하지 못해 주린 배를 붙들고 연희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나서서 조금 걷다 보면 연남동 골목골목마다 맛집을 찾거나 또는 이미 식사를 마치고 예쁜 카페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그들 사이에 숨어들어 자연스럽게 식당에 가서 앉아 따뜻한 밥 한 끼 먹어도 되겠건만 지금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연남동 골목길에 숨어있는 동네 책방이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입장하는 <사이에>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걷는 큰 도로가 아닌 옆길 골목으로 슬쩍 빠져 걷다 보면 소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건물들 사이로 2층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공간이 보인다. 내 눈높이보다 높지만 그렇기에 멀리서도 따스한 불빛이 눈에 잘 띈다. 그곳이 바로 연남동에 자리 잡고 있는 책방 <사이에>이다.
조금 지쳐있을 때 발견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책방은 참 반갑다. 설사 이 곳에서 따뜻한 저녁 한 끼 먹을 수 있는 돈과 시간을 소비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내 배가 주린 것도 잊고 따뜻해 보이는 빛을 향해 스르륵 빨려 들어간다.
몇 년 전에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여행 전문 서점이었는데 이제는 조금 바뀌었다. 여행보다는 조금 더 큰 범위로 예술 분야에 대한 책들이 많고 한쪽에는 음식 관련 책들이 있다. 배도 고픈데 하필 음식책이라니 이럴 수가. 책방에 들러서 워밍업을 하듯이 가볍게 쓱 훑어보면 수많은 책들 중 그 날따라 눈에 띄는 책들이 있다. 평소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주제의 책이더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내 마음, 한눈에 들어오는 표지와 제목, 큐레이션 되어 있는 책의 각도 등일 테다. 다소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다양한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문제에 정답이 있듯, 이 해결하기 어려운 듯한 난제 또한 정답이 있었으니 오늘 나를 *간책한 녀석은 바로 이 녀석이다.(*간책당하다 : 내가 책을 선택하기 전, 책이 먼저 나를 간택하여 책이 나를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이 내 손에 들려 값을 지불해버렸다면, 분명히 내 책상에는 있는데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왜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간책당했던 것이다.)
오늘의 메뉴는 제철 음식입니다_박찬일 (₩14,000)
묘하게 눈이 갔다. 역시 인간은 시각의 동물 이랬던가. 바로 앞에 먹을 것(?)이 그려져 있으니 저절로 눈이 가고 손이 가는구나. 늘 하듯이 책을 슬쩍 넘겨봤다. 지금의 내 기분으로는 나를 선택하려면 꽤나 공을 들여야 할 것이야.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1분 만에 *오늘의 찜에 들어가고 말았다. (*오늘의 찜 : 서점에 들어가서 일단 마음에 드는 책들을 1차적으로 마음속으로 골라 놓는 장치이다. 사진을 찍어 놓거나 메모해놓지 않기 때문에 다른 책을 구경하다 보면 까먹게 되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사라지곤 한다. 가벼운 내 지갑이 감당하기에 퍽 좋은 장치이다.) 그렇게 30여분을 서점에 있는 온갖 책들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펴봤다가 덮었다가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나를 간책한 녀석은 결국 처음 오늘의 찜에 들어갔던 이 녀석이었다. 보통 초반에 찜 된 녀석들은 수없이 추가되는 장바구니에 밀려 잊히기 마련이건만, 이 녀석 매력이 상당하다.
음식 에세이가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음식이 인간의 삶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보통 첫인상을 결정하는 책 표지를 훑어보다 마음에 들면 우선 책을 들고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읽어본다. 수백 페이지가 되는 내용 중 한 두 페이지를 가볍게 살펴보는 것이 전부이지만 이 극악의 확률을 뚫고 내가 선택한 한 두 페이지 내용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이 또한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 결국 내가 집은 책을 들고 계산대 앞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슬쩍 책 뒤표지를 보고 가격을 확인했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라면 괜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따뜻한 저녁을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을 소비하며 데리고 온 책은 나를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 집에 도착하여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보니 과연, 내가 간책당할만했다.
우리나라의 아주 큰 복(福) 중 하나인 사계절, 각각의 계절 파트로 나누어져 제철 재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 책의 저자인 박찬일 셰프는 문예창작과를 나오고 기자 활동을 한 경력이 무색하지 않게 충실한 사전조사와 음식의 역사, 직접 경험한 이야기와 조금은 싱거운 농담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비판까지 아주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 텍스트로 미각을 표현해내기란 쉽지 않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주재료를 사용하고 주관적인 경험을 양념 치듯이 톡톡 쳐내고 사소한 농담으로 버무리니 꽤나 멋진 한상이 만들어진다.
글을 읽고 만족했지만 막상 먹은 저녁은 조금 부실했는지 속이 허하다. 방금 본 책의 지식을 조금 활용해보고자 지금 이 추운 날씨에 먹어야 하는 제철 재료는 뭐가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 "겨울날의 맛 - 딸기, 굴, 꼬막, 참치, 방어, 명태...." 음, 아무래도 지금 내 허한 배를 채워주기에는 딸기가 적당할 것 같다. 문득 최근에 알게 된 그녀가 '딸기는 무조건 설향'이라 주장하던 것이 생각이 나 슬쩍 웃음이 나온다. '요즘 마트에 딸기는 얼마더라? 설향은 얼마나 더 비싸려나? 설향 딸기를 나도 먹어봤다고 하면 좀 기뻐하려나?' 딸기의 가격을 확인하고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며 현관문을 나섰다.
이 계절에 먹지 않으면 몸살을 앓는 음식이 있듯
이 계절에 필요한 위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