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늘 설렌다. <사과 서점>
어떠한 일이나 약속 때문에 내가 거주하고 있는 곳을 넘어 생소한 도시에 가는 일은 굉장히 설레는 일이다. 물론 정해진 시간에 맞춰 도착하여 볼일만 보고 바쁘게 다시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약속 시간보다 여유 있게 도착해서 여유롭게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겠지만 보통 나는 후자를 택하는 편이다.
나는 정말 일정상 바쁘게 움직여야 하지 않는 이상, 1~2시간의 여유를 충분히 두고 약속 장소로 향한다. 아니, 사실은 약속 장소 주변의 책방을 찾는다. 큰 대형 서점도 좋지만 내가 찾는 책방은 골목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작은 공간들이다. 골목을 지나가다 문득 눈길이 닿은 공간을 보고는 "어, 뭐야 여기가 책방이었어"라고 느낄 정도로 숨어있다면 더 좋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하려 우산을 쓰고 걷다가 발견한 대구의 한 골목에 있던 책방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구 좁은 골목 사이에서 <사과 서점>
우산을 쓰고 걷느라 시야가 좁아져서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사과 서점>은 좁은 골목 평범한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은은하게 팻말을 비추고 있던 작은 조명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마침 비가 오고 있어서 날이 흐렸기에 팻말을 비추고 있던 그 조명은 해가 가장 중천에 떠있을 점심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지금 거기 있구나 하며 들어간 공간은 딱 밖에서 보이던 만큼 작고 소박했다.
때론 어떤 책방들은 밖에서 보던 이미지랑 들어갔을 때 이미지랑 다를 때가 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소박한 공간이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다 넓게 펼쳐져 있으면 순간적으로 들어오는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키게 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책방에 들어가서 하나의 책을 선정해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노동에 가깝기 때문에 내 예상보다 더 깊은 공간에 다양한 책들이 자리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오히려 밖에서 보이는 그대로 소박한 책방이 좋다.
소박한 책방이 주는 장점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을 조금만 투자하면 책방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책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몇 평 되지 않는 소박한 서점을 부지런히 돌면서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느덧 몇 번이나 눈인사를 하며 지나쳤던 책도 있는 반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인사하는 책들도 있기 마련이다. 물론 몇 번이나 지나치며 인사한 책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책들을 발견할 때 조금 더 설레는 건 사실이다.
장르가 비주류라서, 너무 얇은 책이라서, 때론 큐레이터가 너무 아껴서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책들이 있다. 그런 숨겨진 책들을 찾기 위해서 몇번이나 서점 안을 돌다가 사람의 눈높이보다 상당히 낮아서 애써 무릎을 굽혀야만 찾아볼 수 있었던, 그림책이 모여있던 곳에서 내가 오늘 데리고 올 녀석을 발견했다.
고사리 가방_김성라 (₩12,500)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부분을 갈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미 넘치도록 가지고 있더라도 욕심을 부리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버젓이 눈 앞에 존재하고 있다면 당연히 손을 뻗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마침 추적추적 비가 오는 조금은 쌀쌀한 날, 이토록 소박한 서점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발견했다면 말이다.
나는 사실 얇은 그림책을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다. 무릇지기 책이라 함은 읽을 글들이 가득하고 내가 그 글들을 읽음으로써 어느 정도의 유익함과 교훈 정도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1차원적 사람이라 종종 읽어보지도 않은 책의 두께만으로 감히 안의 내용을 미리 판단해 아마 이 책은 별 볼 일 없을 거라고 성급하게 결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내가 눈길을 보내고 있는 이 얇은 그림책은 내 편협한 기준에서 많이 벗어난 책이지만, 그런 날이 있다. 전혀 눈길을 보내지 않던 장르나 디자인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다 못해 결국 내 마음까지 빼앗겨 버리는 날이. 늘 쉽게 마음을 주었던 익숙한 장르와는 다르게 낯선 장르가 눈에 들어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내 생애 최초로 성인이 된 후 구입하게 된 그림책이다. 얇은 그림책이었기에 책을 펼친 순간 그 자리에서 모든 내용을 파악하고 다 읽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구태여 조심스럽게 책 표지를 넘기고 두 세장 넘겨본 후에 과감하게 책을 덮고는 얇은 만큼 가벼웠던 그 책을 조심스럽게 들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계산대에서 내 손에 들린 책을 보고는 책방지기님이 씨익 웃는다. 구태여 말은 하지 않았지만 책방지기님은 이 얇은 책에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산대로 가져간 책을 바라보는 책방지기님들의 표정을 보면 대략적으로나마 책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이 책이 어떤 경로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여기 책방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기도 한다. 아주 소박하고 작은 책방만이 가지는 매력포인트이기도 하다.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살이에 지친 어느 날, 벚꽃은 어느덧 피어있고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막 피어나고 있는 벚꽃은 작가를 제주로 오라 하는 신호이다. 조금 느리게 서울에서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면 작가는 고향이자 어머니가 계신 제주도로 향한다.
제주도에서 베테랑 어머니와 함께 고사리를 채집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세히 풀 속을 들여보다 보면 고사리가 보인다. 그곳에는 고사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똥, 말똥, 뱀 그리고 노루의 흰 엉덩이까지 보면서 걷다가 홀로 서있는 벚꽃나무를 보게 된다.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외로워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지에 앉아 있는 새와 둥지, 나무와 함께 하고 있는 작은 벌레들이 보인다. 아마 우리도 그럴 것이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 혼자 내팽개쳐져 있는 것처럼 외롭지만 가만히 둘러보면 묵묵하게 나를 응원하고 지켜주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향을 떠나와 하루하루 열심히는 사는 것 같은데 불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고 나면 그저 그런 사람이 될 것 같은 불안함 속에서도 차마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달리다가 결국 허무해지던 날들.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며 애써 스스로 위로하지만 마음은 계속 공허해졌던 날들. 그런 끊임없는 불안감이 몇 마디 안 되는 글과 소소한 그림에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 때문에 시간이 넉넉하게 도착했던 대구, 비가 와서 하늘이 우중충했기에 더욱 밝게 보였던 조명 밑 <사과 서점> 팻말, 시선이 닿지 않게 낮게 전시되어 있어서 무릎을 굽히고 천천히 읽어봐야 했던 그림책. 모두 내 지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음을.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어딘가로 씩씩하게 걸으면서 그 길에서 찾은,
좋아하는 것들을 담은 불룩한 고사리 가방을 메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