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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망 Mar 10. 2023

09.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경북 청도, 경산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챕터9

#9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다


행운이다. 비 오는 날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니



어젯밤 여러 감정을 느끼며 소주 한 병을 비웠더니 푹 잘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잠에서 깨어나오지 못해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숙소 거실로 나가니 비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행 중 만나는 두 번째 비다.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태풍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지인들의 안부 전화로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검색어 1위가 태풍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매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여행을 하다 보니 먹고 자고 걷는 것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진다. 태풍이 여행에 미칠 영향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 걱정하며 천천히 짐을 챙겼다.


경주에서 다음 목적지인 청도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여행 중 기차를 이용하는 건 처음이다. 평소에 쉽게 접하지 못했던 교통수단은 단순히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비가 창문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몰캉몰캉해진다.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오랜만이라 간식 카트가 언제 지나가나 기다리고 있다가 요즘에는 운영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말이다.



추억 속에 있던 기차 안 풍경은 비슷한데, 간식 카트가 사라진 것은 좀 충격이었다



오늘 일정은 상당히 타이트하다. 목적지는 두 군데이지만 동대구에서 경산으로 그리고 청도로 넘어갔다가 다시 경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시간을 맞추기가 생각보다 힘들기 때문이다.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청도는 차없이 찾아온 게 자랑스러울 정도로 한적한 시골이었다. 심지어 청도에 도착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는 비는 우산을 가지고 있어도 양말까지 흠뻑 젖을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온 사방에 주황색 점처럼 촘촘히 찍혀있는 감나무들과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투박한 회색 담벼락은 내게 색다른 풍경을 선사하여 재미있게 걸을 수 있었다.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청도까지 온 이유는 카페 전체가 개구리와 관련된 물품으로 덮여있어 <청개구리 이야기>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에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몇 시간을 이동해가며 양말까지 흠뻑 젖은 채로 찾아왔지만, 이상하게 멀리서 봐도 내부가 시커먼 게 영 느낌이 좋지 않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카페 출입구까지 뛰어간 나는 내부에 은은하게 비치는 조명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생각하며 카페 문을 열려고 했지만, 문이 잠겨있었다…! 두세 번 덜컹덜컹 문을 움직여 보았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창문을 열고 “오늘 영업 안 합니다.” 한 마디 남겨놓고는 창문을 닫아 버렸다.


너무나 힘들게 여기까지 온지라 아쉬움에 겉모습만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다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정류장을 향해 길을 걷다 보니 집마다 있는 감나무들 사이로 회색 담벼락에 쓰인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문학 골목이라 불리는 담벼락에 적힌 마을 어른들의 삶과 철학을 옮겨놓은 문장들을 천천히 읽으면서 걷다 보니 어디서나 들을 수 있고 때로는 어른들의 잔소리처럼 느껴지는 그 흔한 문장들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니, 그제야 보이던 담벼락에 적힌 글귀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하루에 몇 번 오지 않는다는 귀한 버스를 기다린 지 어느덧 한 시간째.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도로에 조그만 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행여 가만히 앉아있는 나를 못보고 지나칠까 봐 얼른 일어나서 손을 흔드는 내 앞에 버스가 정차했다. 당연하게 지갑에서 늘 사용하는 교통카드를 꺼내니 기사님께서 현금만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우연히 청도로 넘어오기 전, 현금 2만원을 뽑아 놓고 입이 심심해 껌을 구입하고 잔돈을 돌려받았던 나는 다행히 1,000원짜리 2장을 건네고 700원을 돌려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가서 앉았지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만약 내가 현금이 없고 잔돈이 없었더라면? 물론 그 상황에 맞는 다른 해결책이 있었겠지만 어쩌면 훨씬 귀찮아질 수도 있을 일이었다. 혹시라도 소심한 내가 당황해서 현금이 없다고 버스에서 내려버렸으면 그 마을에서 고립되었을 수도 있었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위기였을지라도 나에게는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행운이었다.


겨우 청도 깊숙한 곳을 벗어나 시내에 도착해 경산으로 갈 수 있는 공용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또다시 30분이라는 대기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청도에서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는 긴장감이 풀림과 동시에 배가 고파졌다. 터미널 옆 분식집에서 어묵을 허겁지겁 먹고 있으니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내일부터 4일 쉬니까 좋겠네?”라고 하셨다. 당연히 나와 관련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고는 어묵에 집중하고 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저요?”라는 대답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믿기지 않겠지만 아주머니는 내가 이 근처에 다니는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7년이 지난 나는 굉장히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지금 잠시 대학교를 휴학하고 전국 여행 중이라고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버스가 오기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고 난 뒤 버스에 올라타 앉으니 문득 교복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딱 보기에도 꾀죄죄하게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을 과연 아주머니는 정말로 고등학생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거셨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에서 나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는 누군가에게 기분 좋게 말을 거는 하나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소가 보이는 버스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헤어지기 전 마지막 아주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다. “전국 여행? 아이고~ 그래그래 젊을 때 뭐든 다 해보는 거야.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쉽네. 하고 싶은거 다하고 살어. 인생 생각보다 짧으니께.”



지금도 종종 기억나는 물안개 가득했던 청도 작은 마을의 풍경



나와 4살 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 정현이는 옛날부터 나를 잘 따랐다. 한참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녀석이 어느덧 스무 살이 되고 군대까지 다녀와서는 형처럼 되고 싶다며 나를 따라 건축학과에 지원하여 현재 영남대학교 건축학과에 재학 중이다. 과제 때문에 늦게 마치는 정현이를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형~~~!”이라고 외치며 달려와 안기는 녀석이 너무나도 반갑고 고마웠다.


근처에서 가장 맛있다는 고깃집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소주 한 잔과 함께 배를 채우니 오늘 고생했던 기억은 싹 사라지고 서로의 근황과 사는 얘기를 나누기에 바쁘다. 나로서는 같은 건축학과의 길을 걷는 선배이자 형으로서 들어줄 얘기가 많았고 정현이는 지금 본인이 하는 과제에 대한 질문부터 내가 하고 있는 여행 이야기까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이렇게 잘 맞는 조합 앞에서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공간, 보고 싶은 사람까지 함께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신나게 떠들 수 있었다.



사촌 동생에게 했던 말은 사실, 스스로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여전히 조금씩 내리고 있는 비를 뚫고 정현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에 문득 정현이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늘 낮에 회색 담벼락에서 보았던 그 흔한 문장이다. “정현아.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더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그 순간 순간에 잠시 느껴지는 기쁨. 그거면 사람은 또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너무 얽매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나름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조금 취한 건지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알겠어 형~~!”이라며 따라오는 정현이와 어깨동무하고 함께 걸어간 그 길은 여행 중 걸었던 그 어떤 걸음보다도 소중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 제의 및 협업 요청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작가 메일 : audrhkd0@gmail.com

작가 본계정 인스타 (@storyfarmer_dumang)

쪼렙여행자 인스타 (@jjolevel_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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