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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덤보 Feb 12. 2022

먼지 한 톨 없이 살자더니

잊혀진 이사 첫날의 약속들에 대해

우리 집은 30년 된 복도식 아파트다. 나는 주택에서 태어나 원룸과 투룸, 오피스텔을 거쳐 아파트로 왔다. 폭풍 같은 리모델링을 마치고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 나와 룸메이트는 감탄했다. 하얀 중문이 예뻐서, 해가 잘 들어서, 수납공간이 많아져서, 곳곳의 디테일에서, 그리고 더 이상 이사를 가지 않아도 돼서 행복했다. 직접 고른 것들 하나하나를 들여다보고 만져가면서 “잘 골랐네, 잘 골랐어”셀프 칭찬을 연발했다. 그렇게 취향이 철저하게 반영된 공간에서 손 붙들고 다짐했다.



"먼지 한 톨 없이 살자"



가구를 채워 넣으니 애정의 크기는 더 커졌다. 이사 걱정이 없어진 우리는 값이 나가더라도 오래 쓸 수 있는 물건들을 고심해서 골랐다. 등 배기던 매트리스 대신 구름 같은 침대 위에서 잠이 들고 접이식 테이블 대신 원목 책상을 어루만지며 진한 기쁨을 느꼈다. 적금을 깼지만 아깝지 않았다. 문제는 애정뿐 아니라 먼지도 쌓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애지중지 아껴가며 매일 쓸고 닦던 초반을 지나 “이 정도면 깨끗한데?” 하며 일주일, “오늘은 좀 피곤하다” 하며 이 주일, “어차피 금방 더러워져”로 한 달. 차츰 청소가 뜸해졌다. 그리고 벌어진 틈만큼의 먼지가 집에 내려앉았다.


집 안 곳곳에서 마주치는 청소 요청 신호들(뭔가 밟히는 바닥, 쌓인 빨랫감, 설거지 더미 등등등)을 짐짓 모른척하며 낯선 사람 보듯 대했다. 아는 체하면 달려가서 구조해야 하니까. 눈앞에 있지만 없는 '그것들'을 지나쳐 소파나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빨래는 특정 조건을 충족했을 때 이벤트처럼 발생했다. 더 이상 쓸 수건 또는 신을 양말이 없으면 담당인 룸메이트가 울면서 세탁기로 갔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였다. 식기가 없으면 울면서 고무장갑을 꼈다. 그릇과 컵이 산을 이룬 싱크대에서 한참 설거지를 하고 나면 물을 하도 맞아서 목욕탕에라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청소 이벤트는 가장 강력한 조건이 필요했다. '새로운 사람의 방문'이다. 우리는 비록 청소엔 둔감하지만 이미지엔 민감한 이인 공동체였기 때문에, 집들이를 하면 열심히 집을 쓸고 닦았다. 숨을 참아가며 락스를 두르고 쉴 새 없이 돌돌이를 굴렸다. 지인들이 이 글을 본다면 내가 보내는 집들이 초대장은 "당신을 위해 대청소를 하겠습니다"라는 엄숙한 선언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한창의 반항기를 지나니 나름 안정기가 찾아왔다. 직장인의 고된 현실과 낮은 체력에 맞는 방식으로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글을 쓰는 현재는 적당히 살만한 수준을 유지하는 중이다. 물건은 가능한 쓰고 나서 바로 제자리에 두려고 노력하고 종종 청소기를 돌린다. 그러고 나면 이 정도면 부지런하다고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준다.


이사 첫날의 약속은 그렇게 잊혀졌다. 우주가 아닌 지구에 사는 인간이 먼지   없이 사는  불가능했다. 미니멀은 개뿔 여백만 보이면 가구를 채워 넣을 궁리를 한다. 분명 동경했던 형태는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햇살이 내리쬐는 집에 산다. 집에 있으면 편하고 행복하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불완전을 받아들이니 조금 더 완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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