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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덤보 Feb 24. 2022

멀리는 안 나갑니다

체력 낮은 인간의 주말 산책

 

게임 캐릭터로 치면 나는 법사에 가깝다. 낮은 체력에 정신력 버프를 걸어 살아간다. 그마저도 평일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지는 관계로 주말 최소 하루는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토요일에 약속이 있다면 일요일은 쉬어줘야 하는 식이다. 약속이 없을 땐 주말 내내 집에 있기도 한다.


토요일은 보통 누워있다. 폰을 보면서 충동구매를 하다가 스르르 잠이 들기를 반복한다. 종종 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다양한 이유로 기각된다. 비가 와서, 미세먼지가 심해서, 너무 덥거나 추워서,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컨디션이 별로라서, 그냥 기분이 그래서 등등등.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집과 하나가 된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다가 일요일이 되면 문득 나가고 싶어 진다. 산책 타이밍이 온 것이다.


반경은 넓지 않다. 주로 동네 안팎, 멀어도 도보 15분을 넘기지 않는다. 제일 만만한 건 단지 내에 있는 공원이다. 주변에 신축 브랜드 아파트의 조경이 잘 된 다른 공원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나무가 들쭉날쭉 자란 숲 같은 이곳을 찾게 된다. 풀냄새나 바람 소리를 생생하게 느끼며 걷다 보면 문득 크게 느껴지던 일이 별게 아니게 된다. 지구에 아마존이 있다면 내게는 이 작은 자연이 숨을 트이게 해주는 장소인 것 같다. 여기서 작년 여름에는 배드민턴을 치고 가을에는 핸드볼을 했었다. 진짜 공은 무서워서 어린이용 푹신한 볼로. 한 번은 축구도 했었는데 여자 둘이서 공 하나에 열심히 끌려다닌 기억이 있다.


종종 동네 카페도 간다. 커피가 맛있는 집과 자리가 편한 집, 새로 생긴 곳. 몇 개 안 되는 후보들이 치열하게 접전하는데, 주로 자리가 편한 집이 이긴다. 도착하면 신중히 앉을자리를 선점하고 카운터에서 메뉴판을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늘 그렇듯 아이스 라떼를 주문한다. 주말의 동네 카페는 약간의 북적거림과 원두 냄새, 따뜻하고 갑갑한 공기가 공존한다. 그 지루한 풍경 속에 하나가 되어 읽히지 않는 책을 뒤적거리고 지키지 않을 이 달의 목표를 다이어리 귀퉁이에 적는 일을 좋아한다. 기대보다 맛없는 커피에 실망하고 생각보다 맛있는 디저트에 놀라면서, 여기 치즈 케이크를 잘하는구나 깨닫는, 자잘한 경험의 순간들이 재밌다.


좀 더 스펙터클한 경험이 하고 싶을 땐 백화점 식품 코너에 간다. 여긴 매번 새롭다. 식료품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엄청난 규모의 전시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소금만 해도 함초, 히말라야, 갈릭… 종류가 20개가 넘고 마트에서는 못 샀던 시금치 페스토나 소이마요, 얇은 파스타면도 있다. 온갖 종류의 소금, 소스, 면을 구경하면서 맛을 상상한 뒤에, 요리할 엄두가 안나 결국 초콜릿만 집어 든다. 최근엔 백화점 딸기가 맛있다고 해서 가격을 무릅쓰고 집어 들었다가, 향긋하고 달콤한 맛에 푹 빠져버려서 장 볼 때마다 빼놓지 않고 사고 있다.


여기까지가 1Km 미만 나의 주말 세계다.  좁고 커다란 세계 , 나는 풍경이자 주인공이다. 익숙한 동선을 따라 뱅글뱅글 산책하며 바람을 느끼고 커피를 마시고 장을 본다. 그래서 멀리 나가지 않아도 좋다.  작은 반경 안에서 매일 새로운 일이 펼쳐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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