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거인 VS 개쩌는 감성
아내는 사진빨이 안받는다. 셔터와 눈이 동기화되어 있는지 셔터만 누르면 눈을 감는데다가 아이폰 보정이랑 궁합이 나빠 찍기 전 화면에 비치던 이쁜 모습이 셔터만 누르면 이상해진다. 아기를 키우느라 지친 아내의 다크서클을 아이폰 보정이 확대하는 느낌이다. 폰으로 찍은 아내는 극도로 초췌하다.
우리 아들도 엄마를 닮아서 사진빨이 영 별로다. 일단 엄청 거대하게 나온다. 우리 엄마(아들 할머니)도 항상 왜이렇게 사진으로 보면 아기가 커 보이냐 묻는다. 원래는 작은데 말이다. 아마도 광각 렌즈 때문인듯 하다. 크게 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너무 안이쁘게 찍혔다. 다들 애 낳고 사진기를 산다고 하던데 이유를 알겠다.
아들이 태어난지 5개월이 되었을 무렵 우리는 소니의 RX100M6을 샀다. 당시에 이미 M7이 출시 했었지만 성능의 차이보다 더 큰 가격 차이 때문에 M6로 골랐다. 당시 한국돈으로 약 90만원 중반 정도에 구매했다. 차 살때처럼 "이 가격이면 차라리 조금 더 보태서 저거 하지"하다가 라이카를 살 뻔 했던 우리는 100만원 선에서 절제를 했다.
다양한 플래그쉽 똑딱이들 중에 소니 제품을 골랐던 이유는 아기를 찍기에는 더 유리하다는 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RX100은 강력한 줌 성능, 틸트 액정, 훌륭한 비디오 촬영 성능, 뷰파인더, 후레시 등 없는 기능이 없고 모든 기능이 충실한 올라운더 카메라임에도 불구하고 작고 가벼운 몸체로 휴대성까지 겸비한 카메라다. 아기들은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데 강력한 소니의 셔터 성능은 파닥거리는 아기도 순간의 모습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언제 아기를 안을지 모르는데 대포 같은 카메라는 짐이다.
사진 찍기는 만만치가 않았다. 수동모드로 찍지 않으면 아이폰보다 훨씬 못했다. 게다가 아이폰은 강력한 소프트웨어의 힘으로 역광 상황에서도 배경과 인물을 모두 살려낼 수 있다. 어두운 상황에서도 화사한 모습의 연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카메라는 역광에서는 배경과 인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어두운 환경에서 아기는 못찍는다고 봐야했다.
다만 빛이 훌륭한 상황에서 수동으로 잘 조절해서 찍으면 카메라는 진가를 발휘했다. 아이폰의 유료 필터보다도 훨씬 이쁘게 나왔다. 렌즈 성능이 사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에 진심인 사람들이 왜 무겁게 대포를 들고다니는지 이해가 되는 모먼트였다.
성능이 출중한 카메라였지만 결국 여행갈 때를 제외하고는 잘 들고다니지 않게 되었다. 빛을 너무 많이 타니 사진 찍기가 너무 힘들었다. 집에서 일상적으로 쓰기에는 부적절해서 보통은 봉인되어 있다가 밖에 나가면 종종 썼다. 그나마도 식당에 가면 어두워서 결국은 아이폰을 꺼내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진 추출이었다. 너무 느린데다 단 한 번이라도 오류가 발생하지 않은 적이 없는 소니 카메라앱으로는 블루투스 사진 추출이 너무 번잡했다. 사진을 옮기다 오류가 나면 어디까지 옮겨졌는지 확인을 한 후에 다시 추출할 사진만 따로 선택을 해서 추출해야만 했다. 나중에 결국 케이블을 사서 직접 연결해서 옮기는 방법을 썼지만 너무 귀찮았다.
일상 사진은 결국 아이폰의 자리가 되었다.
그러던 최근 우리는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공동의 뽐뿌를 느꼈다. 우연히 리코의 GR3으로 찍은 사진을 봤는데 너무 이뻤던 것이다. 사진의 감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알아보니 품절 대란이 있는 카메라였다. 아마 처음 카메라를 살려고 검색할 때 GR3을 봤을 테지만 아기 찍기에는 좀 부족한 점이 있어서 포기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짜피 잘 안써지는 카메라, 잘 찍혔을 때 감성이라도 확실한 것이 낫겠다 싶었다.
최근에는 다음 버전인 GR4가 출시되었는데 부족한 편의성 기능을 많이 늘려줬다고 한다. 더 나아진 배터리 성능, 스냅 모드 외부 버튼에 추가, 노출 조절 버튼 추가, 손떨림 방지 등 많은 것이 개선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전원 들어오는 속도가 미쳤는데 1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 손에 쥐고만 있다면 스마트폰과 똑같은 속도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래서 RX100M6을 중고로 팔고 GR4를 샀다. 감사하게도 박스도 없는 2년된 RX100M6가 80만원에 팔렸다. 감가상각보다도 가격 하락이 적은 수준이다.
RX100M6은 처음 사진을 찍었을 때 이게 100만원 짜리인가라는 의문이 생겼었지만 GR4는 찍는 순간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대충 찍어도 감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특히 포지티브 필름 모드라는 GR4의 사진 모드가 있는데 정말 아무거나 찍어도 이쁘게 나올 정도로 대단한 성능을 보였다. 필름 모드는 개인 취향에 맞춰 수정까지도 가능했다. 네거티브 모드도 대단한 성능을 자랑했는데 차분한 느낌에서 음울한 느낌까지 다양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다만 편의성 부족과 성능 부족은 실감이 되는 정도였다. 오토포커스 성능이 형편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포커스가 얼굴을 잡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초점이 이상한 사진이 많은데 가령 손이 또렷히 나왔다던지 옷에 호랑이 얼굴이 또렷히 나온다던지 하는 것들이다. 작은 액정으로는 초점이 잘 잡혔는지 알기가 어려워 나중에 폰으로 받고 나서야 아는 경우가 많다.
틸트 액정의 부재도 꽤나 체감이 되었다. 안그래도 포커스 기능이 떨어지는데 액정마저 다양한 각도에서 보기 어려우니 초점이 맞는지 알기가 더 어려웠다. 또, 아기를 찍다보면 사진이 많이 흔들리다보니 셔터 스피드를 올렸는데 그랬더니 ISO가 엄청 올라가면서 노이즈가 엄청 생겼다. 빛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RX100보다 더 찍기 어려운 카메라였다. 위의 문제들은 RX100을 쓰면서는 전혀 못느끼던 불편함이었다.
다만 초점이 조금 흔들려도 엄청난 색감이 커버를 해준다. 오히려 필름 카메라 느낌이 나기도 한다. 아기가 움직여서 흔들린 사진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풍경이나 사물을 찍을 때는 RX100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강력한 감성을 보여준다. 또 빠른 전원은 오히려 휴대폰 보다도 빠르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몇 주 써보니 만족도가 아주 높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케이블을 이용한 아이폰과의 직접 연결이 되지가 않는데 사진 추출앱 성능이 훌륭하여 별다른 불편함은 없다. 지금은 아기가 어려서 역동적인 사진이 많이 찍히지만 본격적으로 포즈를 잡기 시작하면 만족도는 더욱 커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