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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덤 Nov 03. 2021

그가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_영광의 무게

사무엘상 11장 22절


사무엘상 3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기서 ‘이상’은 히브리어 ‘하존’을 번역한 단어로 꿈이나 계시, 신탁을 의미한다. 오늘날 물성을 지닌 텍스트  또는 스마트기기를 활용한 온라인 텍스트 등 다양한 형태의 ‘말씀’을 접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문명이 덜 발달해 사람들의 관심사가 분산되지 않은 구약 시대, 그것도 왕이 세워지기 전, 한 국가의 형태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방법론적으로 탐구해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지만 문맥상 이유를 가늠할 수는 있다.


사무엘상 2장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아들들, 홉스와 비느하스의 타락한 행태가 묘사된다. 성경은 명확히 말한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여호와를 알지 못해 행실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고 ‘행실이 나빠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써있다. 성품이 나쁜 놈들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없다고 말하는  아니다. ‘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다고 성경은 이유를 제시한다. 이들은 여호와께 드릴 제사물이 바쳐지기도 전에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자 고기를 탈취한다. 단순히 여호와를 몰랐기에 실수를   아니라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존재를 부정하고 탐욕을 숨기지 않았다. 제사장 엘리가 하나님께 책망받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 아들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백성이 주께 드리는 것으로 그들을 살찌게 했다는 .


하나님의 거룩하심 제사의 형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셨는데 제사장의 아들들이 전면에서 하나님을 부정했으니, 처음 율법을 주셨던 때와 비교해 본다면 돌에 맞아 죽지 않은  이상한 상황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권력화 되었을 테고, 직분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권위를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사용하는 처지가 됐다고 판단할  있다. 인간의 원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권력과 물질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새삼 느낀다.


그 결과, 홉스와 비느하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대로 해피엔딩이 되면 좋으련만, 사무엘이 늙어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으나 사무엘의 아들들 또한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기에 이른다. 나참, 답이 없다 정말.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가 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권력을 다스릴 수 있는 더 큰 권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주변국들처럼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형태를 원했던 것일까. 아마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하지만 사무엘은 탐탁지 않았고, 하나님도 원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의 요구를 들어 왕을 세우신다. 그렇게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된 자가 사울이다.


“저는 지방 변두리에 사는 보잘것없는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어째서 사람들이 수도권에 집 한 채 없는 우리 가족을 사모한다고 하십니까?”(나름 오늘의 대사로 해석)


사울은 사무엘이 자신을 높이는 말을 하자 놀라서 말한다. 하지만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유력한’(물질이 아니라 힘을 뜻할 수도 있음) 사람이었다고 묘사돼 있고 사울도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다고 쓰여 있는 것처럼 실제로는 왕이 되기에 적합한 신분과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듯 작은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형태가 나타난다. 사울의 의사와 관계없이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는다. 사울은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단순히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 것 같다. 사무엘이 백성을 모아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그는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어’ 백성 앞에 서기를 두려워한다. 하루아침에 나귀를 치고 소로 밭을 갈던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당황스럽기는 했을 법하다. 사울이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어떤 ‘불량배’(껄렁한 자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한’ ‘불경건한’ 사람들)들은 사울을 멸시하고 예물을 바치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 후 암몬 사람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 소식을 듣자 ‘하나님의 영에 감동돼’ 이스라엘 군대를 모으고 암몬을 멸절시킨다.


이랬던 사울도 후에 왕의 자리,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몸부림치다가 파멸하고 만다. 이 시대에도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는 신실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그 고백은 참으로 인간이 감당하기에 어려운 짐처럼 생각된다. 영광의 무게를 온전하게 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을지 좀처럼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나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평생을 살겠노라 다짐하고 고백하지만 맡겨진 단체를 운영하며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믿음 없는 자처럼 반응할 때가 많다. 요즘 같아서는 사울이 짐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던 것처럼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곳에서 고민 없이 살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울처럼 왕으로 세워질 것이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정작 내가 아무 쓸모없는 자처럼,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다가 평생을 헛된 일에 소진한 것처럼 여겨질까 봐 그게 제일 두렵다.


권력과 영광을 얻는 자리든 그렇지 못하는 자리든 중요한 건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일이다. 두려움과 열등감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더 깊이 빠져들 뿐이다. 믿음으로 반응할 때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나의 상황과 성취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 개인의 영광을 위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반응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고 그 영광을 우리에게도 비춰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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