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투명하고 완벽하게 동그란

디자이너의 건축 여행 #03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

by 덤덤



Leandro Erlich <The Swimming Pool>


가나자와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사진은 아르헨티나 작가의 <The Swimming Pool>이라는 작품으로 수심이 깊어 보이는 물 속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인상적이었다. 호기심 많은 미대생 시절 강렬한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느꼈고 단순한 트릭이지만 사람들을 순수하게 웃게 만드는 이 작품을 언젠가 직접 보러 가리라고 다짐했다.

보고 싶은 작품이 영구히 설치된 곳. 그렇게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30대가 되어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가 오랜만에 이 미술관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다. 독보적인 건축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일본 건축 스튜디오 SANAA의 대표작. 여러모로 기대감을 품고 방문한 이 곳에서 기대 이상의 영감을 얻기를 바라며 22년 가을, 가나자와를 찾았다.


*SANAA는 세지마 카즈요 Kazuyo Sejima와 니시자와 류에 Ryue Nishizawa가 함께하는 일본의 건축 스튜디오로 유려한 곡선으로 혁신적인 건축을 선보인 Rolex Learning Centre, 여러 개의 흰색 박스를 어슷하게 올린 뉴욕의 New Museum, 루브르 박물관 별관인 The Louvre Lens 등을 설계했다. 둘은 따로, 또 같이 일하며 2010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가나자와는 오래된 도시 특유의 고즈넉한 기품을 품고 있었다. 공예품과 정원, 전통가옥이 있는 구역이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전체적으로 조용한 도시의 분위기가 유년시절을 보낸 전주를 떠올리게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피해 들어간 동네 식당에서 평범한 런치 세트를 먹고 미술관으로 향했다. 시내의 메인 도로를 지나 시청의 코너를 돌자 마침내 야트막한 둔덕처럼 밝고 투명하고 완벽하게 동그란 모습의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이 보였다.





밝고 투명하고 완벽하게 동그란 곳


애플스토어가 떠오르는 유려한 외관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 쌀쌀한 날씨에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잔디 위에서 사진을 찍거나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각자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티켓을 끊는 메인 로비에서부터 중정에 자리 잡은 <The Swimming Pool>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리 예약하지 않아서 물속으로 들어가는 특별한 경험은 아쉽게도 포기해야 했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물 안과 밖의 사람들이 서로를 촬영하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퍼포먼스 같았다. 국적도, 언어도 다른 이들과 작품을 공유하며 묘한 연대감을 느꼈다.





미술관은 하나의 큰 원형 안에 크기와 높이가 다른 화이트 큐브를 여러 개를 넣어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이 네모난 전시실을 하나씩 방문하며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전시실의 조도 또한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특별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는데, 작은 창문 하나 없는 방에서 천장에 반투명한 소재를 덧대어 만든 부드럽고 은은한 조명이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동행은 한국에서 걸려온 업무전화에 시달리고, 그 틈을 타서 나는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가 가나자와 시민이었다면 마음이 복잡할 때 익명의 방문객 중 한 명이 되어 마음의 고요를 찾는 장소가 되었으리라. 서울에도 그런 장소가 있던가. 이 글을 쓰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열려있다는 감각


SANAA의 니시자와 류에는 저서 <열린 건축>에서 건축의 보편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건축의 보편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보편성과 마주하는 것은 나에게 이야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알기 쉽게 만드는 일이다.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열려 있다'라고 느낄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상태를 목표로 했다. 분명하게 건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중시했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예비 정보 없이 무심하게 감각적으로 전달되는 건축. 그런 명확함을 가지고 건축을 하고 싶다."


이 건축가가 의도한 그대로 건물의 투명한 외관부터 작품을 만나는 전시실에 이르기까지, 공간에서 느껴지는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만의 열려있다는 감각은 정확히 어디서 오는 걸까.


먼저, 가나자와 시내 중심부와 미술관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미술관이 위치한 블록에 들어서면 미술관 잔디 위에 시선을 유도하는 설치 작품들이 있어 건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미술관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시작한다. 도시를 향해 ‘열린’ 전시가 24시간 진행 중인 것이다.

두 번째로, 시내 어느 방향에서든 진입이 가능하다. 건물 안으로 진입하는 출입구가 동그란 외관을 따라 여러 방향으로 열려있다. 또, 전시실 사이를 이동하는 동안에도 하늘까지 뚫려있는 크고 작은 중정을 만나게 되며 관람객은 물리적으로 ‘열림’을 경험한다.

세 번째로, 미술관 자체가 가나자와 시민들에게 언제나 개방된 공간이 되어준다. 세미나실, 독서실 등 멀티 공간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얼어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의미로 ‘열려’ 있는 것이다.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이렇게 사람들이 소통하는 광장이 되어 관람객과 시민들에게 끊임없는 ‘열림’의 경험을 선사한다. 누구나 편안하게 드나들며 예술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왼쪽)잔디와 구별되는 단을 없애고 공원의 일부처럼 잔디와 연결되는 미술관의 입구.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갈색 건물이 시청. 도시와의 경계가 없어 보인다.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은 개관 18개월 만에 150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문화 콘텐츠가 매력적인 도시, 즉 방문하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 수단인지를 증명했다. 해외 유명 미술관과 비교했을 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있는 미술관이 길지 않은 기간 내에 이런 수치를 기록한 것은 놀라운 성과였다. 특색 없이 똑같은 도시계획과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문제로 고민하는 국내의 지방 도시들에게도 귀감이 될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주변이 어둑해지고 우리는 도쿄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만 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작은 공항을 뒤로하고 메가 시티 도쿄로 향하며 단순한 미술관을 넘어 지역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가나자와를 현대적인 문화 도시로 만들어가는 특별한 공간,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그려본다.


미술관은 오늘도 시내 중심부에서 밝고 투명하고 완벽하게 동그란 모습으로 가나자와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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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 런치세트를 먹었던 동네 식당에서 일본 뉴스를 보았다. 한 시의원이 본인의 아내를 살인하고 타살로 꾸며낸 내용으로 추측했는데,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굉장한 소식이라 집중해서 뉴스를 보며 밥을 먹었다.


- 언젠가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의 시공 책임자의 인터뷰를 보았다. 얇은 구조 기둥, 창문 내/외부의 공조 시스템 등 스쳐가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건축가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분투했다는 것을 설명하는 중년 남성의 눈이 반짝였다.


[정보]

https://www.japan.travel/ko/spot/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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