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산-운동회

기억 끝말 잇기

by 사막물고기


올해는 비가 참 많이도 온다.


만물의 생명인 물도 곤란한 해가 있는가 하면 그 물이 귀하게 대접되는 해가 있기도 하다.


대 자연이 만든 홍수와 가뭄의 완급 조절을 인공 댐으로는 벅차다는 생각이 홍수 피해지역을 보니 생긴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지역은 댐 방류와는 이유가 다르다.


하천의 범람이나, 상하수도 문제, 저지대에서오는 침수의 이유가 더 크다.


그래도 어쨌든 물난리가 할퀴고 간 해는 사람의 두 손이 막아낼 수 없는 한계점을 여실히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굵은 빗물이 후드득 창에 부딪히는 소리를 새벽녘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도 초저녁처럼 어둑어둑한 아침엔 낮잠 한 숨 푹 자고 일어난 저녁이 지금이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월요일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월요일을 한번씩 정산하는 날이 올 것이다.


‘ 오늘은 컨디션이 좋으니 이틀 치의 월요일을 정산하겠어! ‘ 이런 목표의식이라면 조금 더 비장하고 기운차게 월요일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라서 회사는 나갈 수 있는데 어쩐지 아예 건강한 것 같진 않고 잠만 좀 푹 자면 될 것같은데 둘러댈 핑계도 비벼볼 말을 구상하는 게 더 피곤한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간다.


모 광고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노동하고 싶은 날을 자유에 맡겨주는 세상이 올까?


‘ 어젠 왜 못 나왔어? ‘

‘ 그냥, 집 앞 커피숍에서맛이 기똥찬 바닐라라떼를 먹고 나니 빈둥거리고 싶어서 ‘


버스 정류장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보면서 입 모양으로만 삐죽거려본다.


오늘은 내가 가진 우산 중에서 제일 단단해 보이는 1단 무지개 장우산을 챙겨 들고 나왔다.


지하철을 탈 때나 회사에 들어가기 전 물기를 털겠다고 좌우로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다 작은 무지개 우산을 가지고 무용을 했던 초등학교 운동회가 생각이 났다.


요즘 학생들도 운동회 연습을 할까?


땡볕에서 마른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운동회 몇 달 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전교생이 배워나간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운동회 당일 날이 되면 외우고 싶지 않아도 외워진 무용을 딱 그날 하루 했다.


학년별로 돌아가며 정해진 시간에 운동장을 썼는데 구령대에서 미리 안무를 배워둔 학년별 대표 연습생들이 있었다.


얼굴도 예쁘고 춤도 잘 추던 그런 아이들이 했었고 내가 3학년일 때구령대에 섰던 그 친구가 특히 예뻤다.


으짜라 으짜하는 가사가 들어간 탈춤 디스코 같은 노래에 곧게 뻗은 팔 다리를 까딱거리며 모자속에 쏙 가려진 작은얼굴은 꼭 인형 같았다.


나와는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지만 같은 중학교에도 가게 되어서 이름과 얼굴은 알고 있는 셈이었다.


그 아이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보다 많은 사람이 그 아이를 기억했다.


방송에도 몇 번 나와 신기했었지만 그 뒤로는 관심도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쩌다 한번 자신의 추억을 회상할 때 스쳐 지나가는 인물은 구령대 위에 있던 아이들이었다.


구령대 아래 있던 나 같은 아이들은 누구의 기억에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미약한 존재감의 생이 한때는 화가나기도 했고, 비참하기도 했고,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캡처.JPG 사진출처: https://fineartameri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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